복지가 빵에서 나온다고?
  • 유승삼 (언론인·KAIST 교수) ()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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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이 복지 사회 건설에 착수한 것은 절대 빈곤 시대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다. 빵 키우기를 먼저 하고 그 빵을 분배하면서 복지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빵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인
‘한여인이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 엎드려 구걸하고 있다. 등에는 갓난아기가 업힌 채 세찬 빗발을 그대로 맞고 있다.’ 대학 시절, 이런 광경을 보고서 친구들과 논쟁을 한 기억이 새롭다. 한 친구는 주머니 사정 때문에 충분히 돕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또 다른 친구는 아무리 사정이 절박해도 친엄마라면 갓난아기에게 비를 맞히며 구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앵벌이가 틀림없으니 경찰이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누구는, 가슴은 아프지만 방치하자고 했다. 사회의 문제점을 많은 사람이 똑똑히 알게 함으로써 제도적인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맨 나중 주장 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되었든 문제는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부모가 밖으로 문을 잠그고 일 나간 집에서 화재로 숨진 삼남매, 장롱 속에서 굶어 숨진 난치 질환 어린이는 40년 전에 마주쳤던 그 문제와 무엇이 다른가

복지는 철학과 의지에서 나온다

<정복자 펠레>라는 스웨덴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가 보여준 19세기 말 스웨덴 노동자의 삶은 노예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복지 우등국인 스웨덴도 불과 1세기 전에는 형편이 그랬다.그런 스웨덴이 어떻게 복지 선진국이 되었을까. 성장론자들이 부르짖듯 옆에서 누가 죽든 말든 그저 열심히 빵을 크게 키운 결과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스웨덴이 복지 사회 건설에 착수한 것은 절대 빈곤 시대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다. 그래서 저개발과 빈곤 상태가 지속되고 있던 1930~1940년대에 벌써 사회보장제에 의한 복지 사회의 기틀이 정착되기에 이른다. 빵 키우기를 먼저 하고 그 빵을 분배하면서 복지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빵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인간적인가 하는 이념과 제도부터 마련한 뒤 빵 키우기에 나섰던 것이다.

스웨덴만이 아니다. 덴마크 독일 영국 프랑스 등 복지 선진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빵 키우기보다 앞서 마련되었다. 그 합의를 통해 빈곤이나 경제 위기를 극복해 갔다. 복지는 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자 철학에서 나오는 것임을 이들 나라의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이지만 유럽에 비하면 복지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인구통계국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빈곤자 수가 1백30만명이나 증가했다. 의료보장 혜택을 못 받는 무보험자도 1백40만명이 늘어났다. 또 전체 인구의 12.5%인 3천5백80만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했다.

시장절대주의 경제관, 먼저 파이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先)성장론이 미국을 상대적인 복지 후진국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그런 미국의 복지 수준도 우리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그만큼 우리의 복지 수준은 바닥이다. 생각은 굴뚝 같아도 복지에 투입할 경제적 여력이 없다고 변명하지만, 실은 경제 여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복지에 관한 철학과 의지가 없는 것이다.

현재의 복지 선진국들이 우리와 국민소득이 비슷했을 때 복지 지출을 얼마나 했는가를 비교해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국민 한 사람당 GDP가 1만 달러였을 때 각국의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을 보면 스웨덴 27.8%, 독일 25.7%, 프랑스 23.5%, 영국 18.3%, 미국 13.7%, 일본 10.4%였다. 우리 나라는? 고작 5.3%(1995년)였다.

삼남매의 죽음과 장롱 속 어린이의 죽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먼저 복지 사회의 이념과 제도부터 확고히 마련해야 한다. 현정부는 좌파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지만, 실제로 속을 들여다보면 그런 지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알게 된다. 지난 1월에 발표한 참여 복지 5개년 계획은 재정 규모도 적었고 새 이념이나 체계도 없었다. 과거 계획의 재탕이었을 뿐이다.

벌써부터 여러 인사들이 다음 대통령에 뜻을 두고 길을 닦고 있지만 복지 사회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배우처럼 이미지 만들고 조폭처럼 세 불리는 데만 열심이다. 그러나 복지 사회를 설계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국가의 이념과 정책의 뼈대이며 궁극 목표이다. 이제는 시대도 국민도 그런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큰바위 얼굴’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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