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쓰나미’
  • 이문재 기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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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보기에, 이번 쓰나미 이전에 더 큰 쓰나미가 있었다.
바로 WTO 출범과 함께 본격화한 세계화라는 거대 해일이다. 그 세계화의 수혜자로서 남아시아
지역에서 큰 이득을 보았
이제 어엿한 숙녀 태가 나겠다. 올해 열여덟 살이 되었으니, 벌써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인도 소녀 소니아.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기자는 곱게 자란 꿈 많은 이국 소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2년 5월31일,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기 바로 전날, 소니아를 만났다. 유난히 눈이 크고 맑았지만, 소니아는 앞을 보지 못했다. 다섯 살 때 가장이 되어 축구공을 꿰매다가 실명했다는 것이다. 전국민이 붉은 셔츠를 입고 거리로 뛰쳐나오던 그해 6월, 소니아는 어린이 노동을 착취하며 월드컵을 후원하는 초국적 기업에 반대하는 국제적 연대 운동의 한 아이콘이었다.

눈 먼 인도 소녀 소니아에 대한 기억

지난 12월26일, 인도네시아 아체 주 앞바다에서 일어난 지진이 해일(쓰나미)을 일으켜, 남아시아 해안 일대를 강타했다는 외신을 접했을 때, 기자는 부끄럽게도 며칠 안에 사태가 수습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쓰나미의 위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기자는 사무실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세계 전도를 들여다보다가 소니아를 떠올렸다. 쓰나미가 치고 올라간 인도양 일대는, 아프리카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열흘쯤 지난 1월7일 아침, 기자는 신문에 실린 두 개의 그래픽 뉴스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똑같은 지도를 배경으로 했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달랐다. 하나는 미국을 비롯해 중국 영국 인도 일본 호주 등 주요 국가들이 피해 지역에 파견한 군 병력 현황이었다. 다른 하나는 민간과 종교 단체의 재난 구호 상황이었다. 국가별 지원금에 순위를 매긴 막대 그래프도 있었다. 강대국들이 치열한 ‘구호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최대 규모로 집결했다는 군 병력에는 ‘다국적 구호군’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이웃을 잃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데다, 기아와 전염병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피해 지역에 긴급 구호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악마의 창고를 뒤져서라도 빵과 약을 구해 전달해야 한다. 사선을 뚫고 생지옥으로 들어간 비정부기구 소속 활동가들의 헌신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는 방식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인종, 종교와 문화를 초월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정부기구의 자발적 참여는 결과적으로 국가의 도덕성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나는 지질학자가 아니다”라며 당초 서남아시아의 대재앙에 무관심했던 부시 미국 대통령이나, 뒤늦게 지원금 액수 경쟁에 나선 주요 국가들, 구호품을 빼돌려 팔아먹는 피해 국가의 일부 공무원들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저들은 국가라는 우산을 쓰고 이익을 챙기기에 바쁜 ‘비즈니스맨’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민간·종교 단체에 이어 주요 국가의 군 병력이 피해 지역으로 달려갔는데, 정작 뉴스 화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집단이 있다. 다름아닌 초국적 기업들이다. 신자유주의를 엔진으로 하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보기에, 이번 쓰나미 이전에 더 큰 쓰나미가 있었다.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함께 본격화한 세계화라는 쓰나미. 남아시아 일대는 단위 국가를 지배하는 ‘슈퍼 정부’라고 불리는 초국적 기업의 공장이자, 그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이 소비되는 거대 시장이다. 초국적 기업들은 다섯 살 때부터 손가락에 피를 흘리며 축구공을 꿰맨 소니아 같은 반인간적 노동력에 바탕을 두고 급성장했다고 반세계화론자들은 비판한다.

생태론자들이 보기에 이번에 피해를 본 지역은 초국적 기업들에 의해 자연 자원이 쑥대밭으로 변한 지역이고, 평화주의자들이 보기에 남아시아 일부 국가는 내전과 독재 정치가 판을 치는 ‘어둠의 땅’이다. 진보적 경제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세계화가 낳은 극단적인 빈부 격차의 현장을 줄곧 목격했을 것이다.

3년 전 서울에 왔던 소니아는 상처를 안고 돌아갔다. 서울의 한 안과 병원에서 현재의 의료 기술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잔인한 말이지만, 기자는 소니아가 시력을 찾지 않았으면 한다. 그 맑은 두 눈으로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를 아니, 세계화라는 더 무서운 쓰나미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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