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자료를 삶아 먹었나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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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들, 허준영 경찰청장 후보 검증 부실…요청한 자료는 ‘산더미’
57시간 단명 장관으로 기록된 이기준씨가 물러나면서 남긴 업적이 하나 있다. 국민들이 고위 공직자에게 바라는 도덕성을 한 단계 높여 놓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1월14일 허준영 경찰청장 후보(사진) 청문회를 준비한 행정자치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 23명이 한층 많은 자료를 요청했다. 의원들이 요청한 자료는 모두 4백67건에 달한다.

가장 많게는 혼자 63건을 요구한 의원이 있다. 야당 의원이 아니라 열린우리당 심재덕 의원이었다. 가장 적게 요구한 의원은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 단 1건이었다. 그것도 2004년 10월8일 서울지방경찰청 속기록 전문이 전부였다. 청문회에서 김의원은 속기록을 근거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허준영 후보자의 입장을 따졌다.

부인 생활기록부는 왜 요구했을까

철저한 검증을 위해서라면 자료 요청 건수는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의원들이 요청한 자료를 분석해 보면, 불필요한 싹쓸이 요청도 많다. 여야 의원 3명은 부인과 자녀들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생활기록부를 요구했다. 생활기록부를 요청한 한 의원실 보좌관은 “전임 경찰청장 가운데 자제가 경찰청장 표창장을 받고, 그 해에 경찰대학에 원서를 낸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자제의 생활기록부를 요청했다”라고 말했다. 그럼 부인의 생활기록부를 왜 요청했느냐고 묻자, 아무 말도 못했다. 자료 요청을 받은 교육부는 허준영 후보자 이외의 생활기록부는 제출하지 않았다.

싹쓸이 자료를 요청하며 의원들이 단골로 쓰는 방식이 있다. 바로 ‘일체 방식’이다. 한 의원은 ‘경찰 관련 업무외 일체의 외부 활동 자료’를 요청했다. 1990년부터 지난해까지 후보자의 헌혈 내역 일체를 요청한 의원도 있었고, 1980년부터 4촌 이내 혈족까지 출입국관리 기록 일체와 관세청에 신고한 물품 현황 일체를 요청한 의원도 있었다. 한 의원실은 허후보자의 두 딸이 만든 미니홈피를 조사하기도 했다. 요청한 자료에 딸들의 주민등록 번호가 나와 있어 미니 홈피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허준영 후보자는 지난해 12월30일부터 서울경찰청에 청문회 준비팀을 꾸렸다. 모두 14명이 청문회를 준비했다. 청문회 준비팀에 속한 한 경찰은 “과도한 자료 요청이 있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성실히 준비해야지”라고 말했다.

이렇게 싹쓸이로 자료를 요청했으면서도, 여야 의원들은 정작 중요한 검증 대목에서는 허준영 후보자의 입만 쳐다보았다. 청문회에서 병역 문제나 부동산 투기 의혹에 대해 어느 의원도 속시원하게 밝히지 못한 채 그 판단을 여론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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