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밀항을 감행했다면
  • 이문재 (취재부장) ()
  • 승인 2005.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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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열풍처럼 퍼지고 있는 조기 유학은 엄밀하게 말해 경제적인 선택이다. 미래의 일자리를 찾기 위한 ‘조기 선택’이다. 저 어린 것들, 마마보이가 대부분일 초등학생들의 손에 유학 비자를 쥐어주는 ‘보이지 않
마스크는 그렇다 치고 목소리라도 괜찮았다면 연기에 도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있는 ‘연극적 재산’은 비쩍 마른 몸과 열정이 전부였다. 가을 정기 공연을 앞두고 합숙을 하던 어느 날 밤, 연극부장이 다가와 “너, 밀항해라”고 말했다. 밀항? 그때가 1978년, 이른바 ‘그때 그 사람들’이 활개치던 험악한 시절이었다.

그무렵 연극부에 팬터마임을 독학으로 배우던 건축과 선배가 있었다. 신입부원이던 나는 그 선배의 그림자를 밟으며 팬터마임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 시절만 해도 팬터마임은 매우 낯선 장르였다. 연극부장이 내 ‘몸매’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는지 밀항해서 파리 마임 학교에 들어가라고 권유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나는 곧 입대해야 했다.

그때 연극부장은 왜 밀항하라고 했을까. 유신 끝무렵이던 그 시절, 유학은 우리들 사전에 없는 사어(死語)였다. ‘돈 없고 백 없는’ 대학생들에게 유학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이었다. 서울올림픽 이전까지만 해도 유학은 물론 해외(한국이 섬나라라는 분명한 증거다. ‘국외’가 맞지 않는가) 여행도 엄청난 특권이었다. 우리들은 한반도 남쪽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완벽하게 갇혀 있었다.

소수의 특권 아닌 다수의 선택 사양으로 바뀌어

조기 유학이 붐이다(<시사저널> 2월8·15일 자 합병호 참조). 최근 불고 있는 조기 유학 열풍은 몇 가지 특이점을 보인다. 유학을 떠나는 연령대가 초등학교 3~4학년까지 낮아지고, 유학 대상 지역이 중국·인도·필리핀·말레이시아 등 영어를 사용하는 아시아 국가로 확대되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특권이었던 ‘국외’ 유학이 최근 몇년 사이 대중화한 것이다.

최근 언론을 통해 알려진 한 박사 논문(<비동거 가족-기러기 아빠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기러기 가족’은 5만여 가구로 추산된다. 지난해 유학생 수는 약 19만명에 달했다. 기러기 아빠들이 보내는 유학 비용은 한 해 2조2천억원. 북미 지역에 자녀를 조기 유학 보낸 경우, 한국에 사는 기러기 아빠는 1년에 8천만원에서 1억원을 송금해야 한다. 이 논문이 밝혔듯이, 조기 유학을 보내는 이유는 결코 새삼스럽지 않다. 인성 교육이 없으며, 사교육비 부담이 크고, 직업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등 한마디로 공교육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미나 대양주, 유럽권에 이어 영어를 쓰는 아시아 지역이 새로운 조기 유학 대상국으로 떠오르면서, 조기 유학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다수가 선택할 수 있는 차원으로 옮아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기도 지역 가정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에 따르면, 열 가정 가운데 네 가정이 조기 유학을 보낼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극빈층과 서민층을 제외하면, 웬만한 가정에서는 조기 유학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조기 유학은 엄밀하게 말해 경제적인 선택이다. 미래의 일자리를 찾기 위한 ‘조기 선택’이다. 국내에 외국 교육기관이 들어오고, 국내 대학이 외국 대학과 교류하게 되면 조기 유학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지만, 공교육이 제자리를 찾지 않는 한, 그리고 무엇보다 국내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조기 유학 대열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저 어린 것들, 마마보이가 대부분일 저 초등학생들의 손에 유학 비자를 쥐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은 20 대 80 사회를 가능케 한 세계화일지도 모른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나고 자란 기러기 아빠들은 ‘그때 그 사람들’ 치하에서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밀항을 꿈꿀 수밖에 없던 기러기 아빠들, 세계화의 후폭풍을 이겨내며 매달 송금 액수를 채워 넣는 기러기 아빠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돌아올 생각 말아라. 한국을 위해 공부한다고 생각하지도 말아라. 무엇보다 너 혼자 서도록 해라. 그곳이 어디든, 어떤 일이든 무슨 상관이랴. 지구와 세계를 위해 일해라. 그것이 너 자신과 고국을 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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