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통과 퇴물’의 화려한 인생 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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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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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돌풍 이끄는 이호준·김기태의 ‘좌절 딛고 일어서기’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인생의 축소판’인 스포츠에서 통용되는 불변의 진리다. 약팀이 강팀을 꺾고 정상에 올랐을 때, 무명 선수가 각고의 노력 끝에 스타 반열에 올랐을 때 팬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스포츠의 묘미다.

올 시즌 프로 야구의 최대 화두는 SK 와이번스다. 2000년 창단 이후 해마다 하위에 머물렀던 SK는 올해 처음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더니,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삼성과 기아를 물리치고 한국 시리즈에 오르며 ‘SK 돌풍’을 이어왔다.

한국 시리즈행 티켓을 거머쥐고 환호하는 SK 선수들 사이에 특히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 이호준(27)과 김기태(34). 프로 10년차 이상으로 광주일고 동문인 이들은 이번 한국 시리즈를 맞는 감회가 남다르다. 이유는 이렇다.

1994년 9월7일 잠실야구장. LG 김재현이 8회에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145m짜리 대형 홈런을 쳐냈다. 신인으로는 처음으로 20(홈런)-20(도루)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김재현이 힘차게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동안 마운드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군 선수가 바로 이호준이었다.

광주일고 시절 특급 투수로서 연세대와 해태의 스카우트 분쟁에 휘말리다가 1994년 해태 유니폼을 입었지만, 아마추어 시절 라이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김재현에게 의미 있는 홈런을 헌상한 것이다. 그 해에 김재현이 속한 LG는 한국 시리즈 챔피언 트로피를 가져갔다.
입단 후 2년 동안 ‘별 볼 일 없는 투수’ 생활을 한 이호준은 김성한 타격 코치(현 기아 감독)의 권유로 1996년 타자로 전향하는 모험을 했다. 그 해와 이듬해에 팀은 한국 시리즈에서 연속 우승했지만 그는 도무지 흥이 나지를 않았다. 벤치에만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호준은 해태 시절 ‘반항아’로 불렸다. 겨울 훈련 때 야구는 하지 않고 축구에 몰입하다가 발목이 부러져 한 시즌 허탕을 치기도 했고, “외야는 힘들어서 뛰지 못하겠다”라고 대들어 해태 김응룡 감독의 눈 밖에 나기도 했다. 규율이 엄격한 해태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자유분방하고, 술 먹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 항상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던 이호준이 마음을 잡고 방망이를 곧추세웠다. 1998년 타율 3할3리, 19 홈런으로 팀의 중심 타자로 우뚝 섰고, 1999년에도 16 홈런을 쳐내 거포의 이미지를 이어갔다.

2000년 6월1일 그는 구단으로부터 SK로 트레이드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후 거듭된 부상으로 2년 연속 타율이 2할3푼대까지 떨어졌다. 마치 그네를 타듯 그의 인생은 오르락내리락했다.

이호준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 먼저 SK 서포터스의 소개로 2001년 11월 항공 승무원이던 홍연실씨와 결혼하면서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부여했다. 지난해 일본 오키나와 전지 훈련 때는 해태 시절 김성한 코치로부터 배운 오리궁둥이 타법을 부활시켜 감을 잡았고, 결국 타율 2할8푼8리에 23 홈런을 기록하며 재기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3년. 공을 외야 밖으로 36개나 넘긴 이호준은 102 타점을 올려 자기 목표인 100타점을 넘어서며 최고의 해를 맞았다. 프로 데뷔 후 올해로 10년째. 투수에서 타자로, ‘꼴통’에서 ‘범생’으로, ‘기대주’에서 ‘특급 스타’로 탈바꿈하며 이호준은 많은 뉴스를 제공했다.

‘인생 역전’이라는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에서 또 한번 기회가 주어졌다. 팀의 4번 타자로서 그가 SK에 첫 우승을 안기며 비룡(SK의 마스코트)처럼 비상할 수 있을까.
미국 프로 야구 샌프란시스코의 배리 본즈(39)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왼손 타자다. 정규 시즌 MVP를 다섯 차례나 수상했고, 2001년에는 한 시즌 최다 홈런(73개) 기록을 경신하며 역사를 다시 썼다. 그런데 선수 생활 18년 동안 수많은 트로피와 거액을 거머쥔 그가 갖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우승 반지다. 지난해 애너하임과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3승2패로 앞서다가 2연패를 당해 챔피언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 가장 위대하면서 가장 불행한 선수다.

본즈에 비견되는 선수가 바로 김기태이다. 김기태는 1990년대 중반까지 양준혁(삼성)과 함께 최고의 왼손 타자였다. 1994년에는 국내 프로 야구 최초로 왼손잡이 홈런왕에 올랐고, 2000년까지 평균 3할 타율을 기록할 만큼 투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1998년까지 약체팀 쌍방울에 있었던 탓에 늘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1999년 ‘우승 가능성이 높은’ 삼성으로 이적했지만 소속 팀이 가을 축제를 즐기던 2001년 한국 시리즈 때는 부상과 김응룡 감독과의 불화로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첫 한국 시리즈 진출이 좌절되던 순간이었다. “실력이 모자랐던 걸요.”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늘 겸손한 대답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역전’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2001년 타율 1할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냈던 김기태는 지난해 SK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2할5푼7리를 기록해, ‘한물 간’ 타자로 취급받았다. 팀 우승은커녕 본인 스스로도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기태에게는 책임감과 고참의 투혼이 있었다. 올 시즌 사령탑이 바뀌어 뒤숭숭했던 팀 분위기를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 잘 추슬렀고, 아픈 몸을 끌고 93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9푼2리를 기록했다. 포스트 시즌 다섯 경기에서는 11타수 6안타(5할4푼5리)를 쳐내 첫 한국 시리즈행을 자축했다.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기까지 무려 13년. 우승 경험 없이 야구판을 떠날 것 같았지만 기적처럼 한국 시리즈에 올랐다.

김기태는 ‘인생 역전’의 순간에서 오늘도 야구 선수로서는 환갑인 30대 중반의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그의 현역 야구 인생에서 마지막 목표인 우승을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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