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T가 ‘비행기 병’이라고?
  • 전상일 (환경보건학 박사·www.eandh.org) ()
  • 승인 2003.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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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과 항공 여행 무관’ 입증 잇따라
94년 미국의 부통령 댄 퀘일은 며칠간 비행기 여행을 마친 뒤 다리에 혈전(피떡)이 생기는 증세를 호소한 적이 있다. 2001년 가을에는 28세 영국 여성이 시드니에서 런던까지 비행기를 이용한 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곧바로 사망했다. 지난 3년간 영국에서는 적어도 30명이 비행기 여행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질병을 ‘정맥 혈전증(deep vein thrombosis;DVT)’이라고 한다. ‘이코노미클래스 증후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DVT는, 피 흐름이 느린 다리나 허벅지의 정맥에 혈액 응고물이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DVT 그 자체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가 아니지만, 다리 정맥 내에 생긴 피떡의 일부가 혈류를 타고 폐로 들어가면 ‘폐혈전 색전증’을 일으켜 호흡 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다.

댄 퀘일 사건이 발생한 후, 프랑스 파스퇴르 병원의 연구진은 다섯 시간 이상의 비행기 여행을 한 사람들에게 DVT 발생 위험이 4배나 높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후 ‘비행기의 비좁은 좌석에 오랫동안 앉아 여행을 한 탓에 DVT가 생겼다’는 승객들과 ‘DVT는 비행기 여행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항공업계 사이에 치열한 법정 공방이 전개되었다.

임신부·산모·노인은 ‘DVT 위험군’

비행기에 면죄부를 선사하는 일련의 연구들이 이어졌다. 2000년 네덜란드의 의사들은 비행기 여행을 마치고 DVT 증세를 호소한 8백여명을 대상으로 검사를 실시했으나, 둘 사이에 뚜렷한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난 6월 영국의 연구진은 비행기 내의 낮은 기압과 낮은 산소 농도는 혈전 생성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달 뒤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진이 비행기 탑승으로 인한 DVT 발생 위험은 매우 낮으며, 비즈니스클래스와 이코노미클래스 승객 사이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 결과를 전해들은 영국 법원은 앞으로 비행기 승객은 DVT를 이유로 항공사를 상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선언까지 해버렸다. 여기에다 며칠 전 ‘장시간 비행기 여행으로 인해 DVT가 발생할 확률은 4만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호주 연구진의 발표는 비행기 승객들에게 DVT에 대해 ‘이제 안심해도 좋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론은 이렇다. DVT는 오랫동안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경우에 발생할 위험이 높아지는 것이지, 비행기 여행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이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비행기 여행의 특성상 DVT 발생 위험이 높은 것은 사실이므로 예방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탈수가 되면 피가 진해지고 혈전이 생성될 위험이 커지므로, 비행 중 탈수를 촉진하는 커피나 알코올 섭취는 자제하고,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바지는 꽉 끼는 것보다 느슨한 것으로 입고, 앉을 때는 다리를 꼬지 않는 것이 좋다. 혈류 흐름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가끔씩 일어나서 돌아다니거나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것도 좋다.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도 잊지 말자. 과거에 혈전 현상이 나타났던 사람은 탑승 전에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특히, 최근에 수술 받은 사람, 임신부,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산모, 노인, 비만인 사람, 피임약이나 여성 호르몬제를 복용 중인 여성 등은 DVT가 발생하기 쉬운 위험군에 속하므로 특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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