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조절론’ 유감
  • 독일 뮌스턴 대학 교수 ()
  • 승인 2000.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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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남짓 냉전-혈전-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별 변화가 없을 것처럼 보였던 한반도 정세가 올해 들어 급한 기류에 휩싸이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북·미 관계 개선의 속도도 예상 밖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변화를 몰고 오는 남북한과 주위 열강은 자기 중심적으로 각각의 이해를 증진하고자 새로운 합종연횡(合縱連衡)의 무대를 한반도 뒤에서 펼치려 한다.

북·미 관계 개선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 미국 행정부는 그동안 남북한 양쪽에 급격히 영향력을 신장한 중국을 의식하고, 특히 군사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북한에 접근하고 있다. ‘한·미·일 공조체제’라는 기본 틀에 안주해 온 남한은 이러한 북·미 관계 개선이 결국 남한의 대북 협상 능력을 훼손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심지어는 북한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한과의 긴장 완화라는 지렛대를 이용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면, 그날로 남북 관계를 동결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우선 평화 정착 문제만 해도 그렇다. 1953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치하는 문제는 국제법적으로는 북·미 간의 문제이다. 그래서, 주한미군 문제는 북·미 간의 협상 의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동시에 한국군 지휘권 문제와 결부되었기에 남한과 미국 간의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이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동북아의 안정을 위해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데에 김정일 위원장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지만, 나는 이러한 이야기가 너무 앞서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한미군이 대북 견제력이 아니고,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안정을 담보한다는 판단은 오늘 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판단은 앞으로 중국의 역할이 동북아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한미군이 일종의 평화유지군으로서 남북한의 이해 관계를 넘어설 수 없는 조건에서 주한미군의 존재를 납득했다는 이야기는, 바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데에서부터 연유한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2+2’라는 도식이 자주 이야기되고 있다. 남북이 한반도 평화 정착의 주체가 되고, 이러한 분위기를 미국과 중국이 적극 돕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 평화 정착 주체의 역량이 현재 얼마나 있는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의 실재적 역할이 사실 더 크게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균형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남북 간의 뿌리 깊은 불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에서 ‘속도 조절’이라는 말이 자주 이야기되고 있다. 남북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되어 정신 차릴 수 없으니 조금 정리해 보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가 속도 조절을 이야기하면서도 우선은 상대방이 속도 조절을 핑계로 근본적인 남북 관계 개선을 뒤로 미루지 않나 의심하고 있다. 대남 관계 인력이 부족해 이산가족 상봉이 늦어지고 있다고 해도 믿지 않고,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여전히 ‘한·미·일 공조체제’라는 단어가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통일보다는 평화, 통일 교육보다는 민족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 말이 결국은 북을 ‘개혁’과 ‘개방’으로 유도하려는 전략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석될 소지가 많이 있는 그러한 불안정이 현재 남북 관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 불신을 하루아침에 혁파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남북의 지도자는 물론 각계 각층이 자주 만나 그때그때 오해나 불신의 소지를 없애는 길 이외에 다른 도리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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