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3차 대전 화약고
  • 프랑크푸르트/허 광 (rena@sisapress.com)
  • 승인 1999.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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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전쟁 때 위기 조짐 드러나…독일의 세계 전략 주목해야
21세기가 서방 내부의 충돌도 가능한 ‘3차 세계대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얻게 될까? 서방측이 바로 올해 ‘일치 단결’하여 코소보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보면 이런 ‘예언’은 근거 없는 가설이 아닐까? 그런데 바로 코소보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지 모른다고 경고한 인물이 있다. 영국군 장성인 마이클 잭슨. 나토의 코소보평화군 사령관이다. 그는 왜 이런 경고를 했을까?

지난 6월11일 나토가 공습을 끝낸 시점에서 러시아군은 나토군에 앞서 기습적인 코소보 주둔 작전을 벌였다. 보스니아에 주둔한 러시아군 특수 정예 부대 2백명은 이틀에 걸친 작전 끝에 군사 요충지인 프리스티나 공항에 주둔했다. 러시아군은 그 후 코소보에 별개 주둔 지역을 갖고 나토사령부 밑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며 두 가지 요구를 내세웠다. 이 사태에 놀란 미국은 외교 경로를 통해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러시아가 물러서지 않을 경우 IMF 금융 지원을 축소하겠다는 경고였고, 또 하나는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설득해서 러시아군의 이 나라 영공 통과를 저지하는 외교 협상이었다. 러시아는 7월 초, 이같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정부가 ‘외교적 해결’에 나서기 전에 일어났다. 그 발단은 나토사령관 클라크가 잭슨에게 보낸 지령이다. 러시아군을 폭격해서 프리스티나 공항에서 밀어내라는 것이었다. 잭슨은 “3차 대전을 시작할 수는 없다”라고 이 지령을 거부했다. 이 때 마케도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나토군은 러시아군을 공격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잭슨이 클라크의 지령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러시아군 공격 작전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나토 무너지면 위기 닥친다”

클라크와 잭슨 사이에 벌어진 이 긴박했던 순간의 내막은 <뉴스 위크>가 처음 보도했다. 클라크에게 ‘내년 초 조기 퇴역’이라는 지침이 전달된 지 1주일이 안된 시점이다. 클라크는 미국과 유럽 사이에 나토 공습 중에 일어난 마찰에 책임을 졌다고 한다. 그런데 러시아군 폭격 지령을 비롯하여 그의 조기 퇴역을 불러온 사태에 미국 정부는 무관했던 것일까? 런던 로열 유나이티드 서비스 연구소 소장 조너선 이얄은 러시아와의 군사 충돌 문제를 놓고 벌어진 사태가 미국과 유럽 사이에 있었던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적게 보도된 사건’이며 냉전 이후 ‘가장 큰 외교 위기’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국 정부의 동의 없이 클라크가 이같은 모험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면 ‘3차 대전’의 위험성은 코소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3차 대전이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미국·러시아, 미국·중국뿐만 아니라 서방 내부의 충돌도 포함된다. 물론 서방 내부의 충돌이라고 할 때 반드시 전쟁을 뜻하지는 않는다. 서방 내부, 즉 미국과 유럽의 이해가 적대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지역 분쟁이 기본적으로 이같은 적대적인 이해를 반영하는 사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같은 상황은 나토가 무너지는 사태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코소보 전쟁이 있기까지 유럽연합(EU)은 나토와 별개로 독자적인 안보 전략을 논의해 왔고, 이 같은 작업은 바로 코소보 전쟁을 계기로 삼아 이제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먼저 지난 11월15일에는 유럽연합이 결성된 이후 처음으로 국방장관 회의가 열렸다. 또 11월 말, 영국·프랑스, 독일·프랑스 정상회담에서는 중요한 합의가 있었다.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4개국이 지금까지 연구해온 안보 전략에 일치를 보고 그 합의 사항을 12월 초 헬싱키에서 열리는 유럽연합 정상회의에 제안한다는 것이다. 4개국이 안보 전략에서 일치했다는 점은 특히 영국의 노선이 변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영국은 미국을 의식해서 유럽연합의 독자적인 안보 전략에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제 프랑스·독일의 노선에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야당인 보수당은 이같은 노선이 “나토를 와해시킬 수 있는 위험한 조처이며, 영국이 프랑스의 반미 외교에 말려들었다”라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4개국이 합의한 원칙이 이런 비난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4개국 합의에는 유럽연합이 군사기구를 갖는 문제가 걸려 있다. 54년에 출범한 서유럽동맹(WEU)을 유럽의 군사기구로 승격시킨다는 구상이다. 서유럽동맹은 원래 독일(서독)을 감시하는 군비통제 기구로 출범했다. 패전국 독일이 나토에 가입해 재무장하게 될 경우에 불안을 느낀 주변국이 만든 것이다. 독일은 나토 가입을 통한 주권 회복이 시급해 서유럽동맹에 가입하고 독일의 군비를 감시·통제하는 조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같은 통제 조처는 독일 군수산업의 압력으로 86년에 이르러 모두 폐기되었다. 그 후부터 서유럽동맹은 독일에게 매력 있는 기구로 떠올랐다.

서유럽동맹은 나토와 달리 미국이 들어 있지 않아 유럽연합의 군사기구로 확대할 수 있는 기구였다. 그러나 미국은 오래 전에 이같은 사태에 대비해 서유럽동맹 조약 4조에 ‘나토군사령부와 중복되는 기구는 두지 않는다’는 조항을 두게 했다. 미국은 이 조항을 통해 서유럽동맹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92년 6월 독일이 주도해서 만든 페테스베르크 선언이다. 서유럽동맹은 이 선언에서 군사 작전 능력을 강화하고 그 범위를 유럽 바깥, 즉 나토의 방위 지역 밖으로 확대했다. 나토 지역을 벗어난 군 작전에는 당연히 미국의 통제를 받을 수 없다는 이점을 살린 것이다. 그 후 92년 11월 독일 국방부는 통일 이후 처음으로 개정된 방위 요강에서 독일군을 전세계의 시장과 원료 지대에 무제한 파병한다는 방침을 공개했다. 독일식 세계 전략의 실체를 처음으로 드러낸 것이다. 독일은 서유럽동맹에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까지 가입시키는 ‘서유럽동맹 확대’ 작업을 지금까지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유럽의 군사적 독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가지 사례로, 서유럽동맹은 처음으로 역외 작전을 벌인 90년 중동전에서 미국의 위성 정보를 받지 못한 채 ‘눈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 후 위성 정보 시스템 구축은 서유럽동맹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바로 올해 항공우주산업을 합병해서 정보 수집 능력에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다. 4개국 합의는 이같이 해외 작전 능력을 갖춘 서유럽동맹을 유럽연합의 군사기구로 공식화한다는 것이다. 해외 투입군을 3년 이내에 조직해 2003년부터는 전투 병력 4만명을 전세계 위기 지역에 투입한다는 계획도 있다. 냉전 이후 미국의 간섭 없이 전쟁을 치르겠다는 유럽의 의지는 이제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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