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 없는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1999.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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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광고·종교 등 통해 유포…인간 일상에 침투, 생각과 행동 지배
텔레비전·광고·종교 등 통해 유포…인간 일상에 침투, 생각과 행동 지배

결혼을 앞둔 이기영씨는 친구와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혼은 한 번 하면 무르기 힘들어. 살아 보고 결혼하는 게 제일 좋은데…”라는 말을 들었다. 우스갯소리처럼 던진 친구의 말을 그 역시 농담으로 맞장구치며 받아 넘겼다. 하지만 그 날 저녁 여자 친구를 만난 그는 “결혼은 일단 하고 나면 무르기 힘드니까 우리 살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어떨까?”라며 의견을 물었다.

기영씨는 슈퍼마켓에서 음료수를 살 때마다 C 주스를 고른다. 오렌지 주스만 보면 오렌지를 통째로 갈아 만든 C 주스의 CF를 자신도 모르게 연상한다. ‘그래, 주스는 오렌지를 통째로 갈아 만든 게 시지 않고 맛있어’라고 중얼거리며 다른 주스를 밀어내고 값비싼 C 주스를 집는다.

기영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친구로부터 ‘살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마인드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 또 무심결에 본 CF를 통해 ‘오렌지를 통째로 갈아 만든 오렌지 주스가 가장 맛있다’는 마인드 바이러스에도 감염되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신문·텔레비전이나 거리에 즐비한 광고를 본 사람은 그 순간 새로운 마인드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인드 바이러스는 ‘예고 없이’ 침입해 컴퓨터를 ‘깡통’으로 만드는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사람들 사이에 은밀하게 퍼져서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을 바꾼다.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인간 뇌에 침입

마인드 바이러스라는 개념은 ‘밈(Meme)’에서 출발했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76년 출간한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밈’이라는 신조어를 선보였다. 문화는 비유전적인 방법으로 전달되면서 복제되고 진화하는데, 도킨스는 밈을 ‘유전적 방법이 아닌, 특히 모방을 통해 전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 요소’라고 정의했다. 도킨스는 밈의 대표적인 예로 노래·사상·선전 문구·패션과 도자기 굽는 방식, 건축 양식 등을 들었다.

유전자가 정자나 난자를 통해 하나의 신체에서 다른 하나의 신체로 건너뛰어 유전자 풀에 퍼지는 것과 똑같이, 밈도 넓은 의미에서는 모방을 통해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건너뛰어 밈의 풀에 퍼진다.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죽을 때 유전자와 밈 두 가지를 남길 수 있다. 유전자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희석되어 수백 년이 지나면 흔적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밈은 영구히 지속될 수 있다. 좋은 사상을 전파하거나, 작곡을 하거나, 기계 장치를 발명하거나, 시를 써서 창출한 밈은 영구히 지속된다.

밈은 개별적으로 인간의 뇌에 침투하지만, 인간의 뇌에는 여러 가지 밈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간의 뇌에 함께 존재하는 여러 가지 밈은 모여서 마인드 바이러스를 형성한다. 마인드 바이러스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침투해 사람의 의지와 생각의 방향을 조종하거나 심지어 삶을 파괴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여성의 마음에는 ‘패션을 아는 것이 좋다’라는 밈과 ‘유행에 맞게 옷을 입은 여자가 앞서간다’라는 또 다른 밈, 그리고 ‘나는 앞지르고 싶다’는 세 번째 밈이 있을지도 모른다. 짧은 치마가 유행할 때 그것을 입는 행위는 여성의 마음 속에서 이들 밈이 함께 작용한 마음의 바이러스가 초래한 행동이다. 협력 관계인 여러 밈을 가진 여성이 많을 경우 ‘짧은 치마가 유행이다’라는 또 하나의 밈에 의해 미니 스커트를 입는 마인드 바이러스가 전파된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단 종교나 텔레비전 광고·정치가의 선전 등 온갖 마인드 바이러스에 둘러싸여 살고 있으며, 그 영향은 궁극적인 삶의 목표와 심지어는 일상 생활의 사소한 선택에까지 미친다.

마인드 바이러스의 실체를 설명하고, 이에 대처할 방안을 소개한 책 <마인드 바이러스>를 쓴 리처드 브로디의 주장에 따르면, 마인드 바이러스는 미니 스커트나 유행어처럼 비교적 해롭지 않은 것을 비롯해 미혼모, 10대 갱조직, 기독교 이단 집단과 같이 인간의 삶을 심하게 탈선시키는 것까지 다양하다.

78년 9백명이 넘는 신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민사원 사건, 93년 미국 텍사스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불을 질러 86명이 집단 자살한 다윗파 집단 자살 사건도 마인드 바이러스가 부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가깝게는 지하철 테러를 벌인 일본의 옴 진리교, 우리나라의 오대양 사건 등도 마인드 바이러스가 초래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가의 선전 또한 강력한 마인드 바이러스이다. 정치가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 득표하기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마인드 바이러스로 대중을 공략한다.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이 모든 문제는 전임자가 원인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이제까지 해온 것 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라는 마인드 바이러스를 연설이나 홍보물을 통해 대중의 뇌에 유포하는 것이다.

광고 역시 강력한 마인드 바이러스이다. 소비자가 물건을 살 때 특정한 브랜드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 제품의 광고가 유포한 마인드 바이러스에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광고를 통해 유포된 마인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소비자는 자신도 모르게 “갈증 해소에는 ‘G’ 음료, 농구화는 ‘N’ 제품이 좋아”라고 중얼거리며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특정 브랜드를 찾게 된다.마인드 바이러스, 정보화로 침투력 강해져

정치 선동이나 광고, 이교도 집단의 마인드 바이러스는 일정한 목표를 갖고 의도적으로 유포된다. 그러나 마인드 바이러스 가운데는 비의도적으로 유포되는 것도 많다. 친구와 나누는 수다나 주변 사람과 목적 없이 하는 대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대중 가요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로 유포된 마인드 바이러스 또한 비의도적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이 비가 오는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 선물하는 것은 마인드 바이러스의 영향이지만, 이 노래가 그런 행동을 의도적으로 초래했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비의도적인 마인드 바이러스라고 해서 유해하지 않다는 보장은 없다. 가령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 10대 매춘의 마인드 바이러스를 예로 들어 보자. 한 여학생이 친구로부터 ‘원조 교제를 하니까 돈도 벌고, 신나게 놀 수 있어 좋더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학생은 원조 교제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밈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생각이 변하게 된다. 그가 갖고 있던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좋다’ ‘신나게 놀 수 있다’라는 밈이 ‘원조 교제는 돈도 벌고 놀 수 있는 것’이라는 새로운 밈과 결합해 ‘원조 교제는 나쁘다’는 기존 밈을 물리친다. 그 결과 여학생은 ‘나도 원조 교제를 하고 싶다’는 마인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원조 교제를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산되는 마인드 바이러스가 더 많은 여학생을 전염시켜 오늘의 10대 매춘 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마인드 바이러스의 침투력은 정보화 사회가 진전함으로써 더욱 강해졌다.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밈 기계>를 펴낸 수전 블랙모어는 “인터넷 혁명은 밈이 더 빨리 더 멀리 퍼지도록 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국경은 물론 언어의 경계마저 무너뜨리는 인터넷으로 인해 더 많은 밈이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브로디는 “마인드 바이러스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일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삶을 파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우리를 프로그램화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마인드 바이러스라고 해서 빨리 퍼지고 나쁜 마인드 바이러스라고 해서 늦게 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미에서는 마인드 바이러스 연구 활발

<생각의 전염>을 펴낸 애런 린치는 이 책에서 밈이 전파되는 과정을 일곱 가지 특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밈은 삶에 얼마나 유익한가 혹은 얼마나 진실한가에 따라서가 아니라 일정한 특성에 따라서 빠르게 혹은 느리게 퍼진다. 가령 그 밈이 삶에 도움이 되든 안되든 어른보다는 아이에게서 더 쉽게 전파되고, 어른에게서도 반복하거나 보상이 주어질 경우에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잘 전파된다는 것이다.

구미에서는 밈과 마인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과학인 메메틱스가 활발하다. 앞에서 언급한 리처드 브로디·애런 린치·수전 블랙모어 등은 메메틱스 전도사라고 불린다. 구미에서도 이 메메틱스가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마인드 바이러스의 잣대로 모든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그러나 밈이 퍼지는 원리를 잘 이해하면 스스로를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밈으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귀를 기울일 만하다. 수전 블랙모어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밈이나 마인드 바이러스에 감염되기도 하지만, 밈이나 마인드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밈 기계’로 길러지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의 삶을 황폐화하는 어떤 마인드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마음의 프로그램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갈 밈을 의식적으로 채택해야 한다. 좋아하는 밈,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밈을 만나면 의식적으로 퍼뜨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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