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겁내지 않는 링의 지배자
  • 이문환(<헤럴드 경제신문> 기자) ()
  • 승인 200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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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이종격투기 대회 빛낼 최고 스타 이은수·홍주표·허승진
쇼비즈니스란 스타를 먹고 산다. 케이블 채널을 통해 해외 유명 대회가 국내에 소개되고 사상 최초로 대회가 열린 2003년은 한국의 이종격투기 원년이었다. 올해 역시 기존 메이저 대회들이 신발끈을 고쳐매고, 신설 대회들도 잇달아 개최 준비에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흥행을 위해 분주히 뛰고 있다. 지난해 격투기계를 이끈 것이 경기를 주관하는 프로모터(흥행사)였다면, 올해는 여러 대회를 통해 배출된 스타급 선수들이다. 지키는 자와 도전하는 자 사이의 긴장감은 관객을 매료하는 최고의 흥분제이다.

이종격투기의 매력이란 문파를 불문하고 누가 최고수인지를 가리는 것, 즉 최강자에 대한 동경과 환상에서 비롯한다. 지난해 10월 메이저 대회 ‘스피릿MC’ 2회 대회의 헤비급 우승자인 ‘야수’ 이은수(22)가 격투기에 입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릴 적부터 혼자 거울 앞에서 영화 속 주인공 록키를 흉내 내기를 즐겼고, 심지어 싸움이 너무 좋아 길거리에서 ‘양아치’들과 마주치면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본 격투기 선수 겸 프로레슬러 엔센 이노우에의 난폭한 경기를 인터넷 동영상으로 본 이후부터였다.

이후 킥복싱·아마추어 레슬링 등 각종 무술을 닥치는 대로 배운 그는 지난해 4월 서울에서 열린 스피릿MC 1회 대회 결승전에서 ‘무에타이 전사’ 이면주(27)와 만나 세 차례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타고난 체력과 체격(185cm, 105kg)으로 ‘하드웨어’만큼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이면주와의 승부에서 ‘마운트 포지션’(상대의 몸 위에 올라타 꼼짝 못하도록 제압하는 자세)을 확보하고도 패한 것은 그가 기술적으로 초보자인 탓이었다.

이은수는 “경기 중 관중이 상대 선수를 죽이라고 외칠 때 몸서리가 쳐졌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링에 올라가면 눈앞의 ‘적’을 부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고 항복은 죽기보다 더 싫다고 내뱉는다. 일본인들이 즐겨 쓰는 말을 빌리자면 ‘투쟁심’이 강한 것이다. 이은수가 뚝심을 무기로 하는 ‘길거리 싸움꾼’ 출신이라면, 지난해 11월 네오파이트 첫 대회 미들급 우승자인 홍주표(35)는 정상의 길을 걸어온 엘리트다. 1998·1999년 택견 명인전 2연패, 2002·2003년 택견 최고수전 2연패를 달성한 그는 명실상부한 택견의 최고수다. 택견 4단에 유도 3단, 검도 4단으로 무술 경력만 10년이 훨씬 넘는다.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를 보면 영락없는 신세대이지만, 술과 담배를 일절 입에 대지 않고 하루 최소 5시간을 수련에 매달리는 훈련 중독자이다.

홍주표가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택견보다는 최근 들어 배우기 시작한 브라질리언 주지츠의 덕이 더 컸다. 예선전 첫 경기에서 택견 특유의 가벼운 스텝을 밟다가 상대의 기세에 밀린 그는, 그 뒤부터는 줄곧 킥복싱 및 유술을 결합한 경기를 펼쳤다. 택견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데에는 실패한 셈. 하지만 그가 꺾은 이들 중에서 힘과 기량이 만만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4강전에서 만난 상대는 킥복싱 등 입식타격 격투 대회의 최고봉인 K-1에 출전한 경력이 있는 스캇 시리(35). 결승전에서 만난 이는 실전대회 경험이 풍부한 가라데 고수 오쿠다 마사카쓰(27)였다. 오쿠다는 2000~2003년 전일본격투기선수권대회를 4연패한 베테랑이고 지난해 7월 판크라스 네오블러드 토너먼트에서 준우승한 실력자여서 대회 전부터 우승 후보 0순위로 꼽혔다. 비록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 덕을 보았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홍주표는 막강한 ‘외세’와 맞붙어 전통 무술의 가치를 드높였다. 올해 그의 활약이 기대되는 이유다.

일본 대회 입장료, 최고 100만원

‘큰 물’에서의 성공을 바라보고 일찌감치 격투기 선진국인 일본으로 진출한 허승진(30). 현재 해외에서 활약하는 유일한 선수로서 일본의 중상급 규모 대회인 판크라스에서 활약하고 있다. 1997년 한국프로태권도선수권, 1998년 한국합기도선수권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적이 있는 그는 지난해 10월31일 판크라스 데뷔전에서 다카모리 게이코(27)에 1회 18초 만에 레프트훅 KO승을 거두었다. 전력이 열세라는 주변의 평가를 보란듯이 뒤집은 통쾌한 승리였다.

그러나 한달 보름 뒤 일본 도쿄에서 치른 두 번째 경기에서는 유술 기술이 뛰어난 신예 나이토 유키아(26)에게 목과 팔을 동시에 조르는 ‘어깨 굳히기’ 기술로 패해 현재 일본에서의 전적은 1승1패. 그는 올해 말까지 판크라스 소속 도장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체계적인 훈련을 쌓을 예정이다.

일본의 경우 프로레슬러 사쿠라바 가즈시(35), 유도 선수 시절 전기영과 맞수였던 요시다 히데히코(35) 등은 외국 강자들과 대등한 승부를 펼치며 팬들을 끌어모으는 흥행 보증수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일본의 메이저 대회인 프라이드FC에서 가장 비싼 입장권 가격이 10만 엔(약 100만원)에 이르는 것도 바로 이런 스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종격투기가 이제는 낯선 단어가 아니지만, 실제로 돈을 내고 경기장을 찾는 관중 숫자는 아직 수천 명 수준이다. 이종격투기가 ‘반짝 인기’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해 등장한 스타급 선수들의 분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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