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제3 국산 신약 줄지어 나온다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9.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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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플라주’ 이어 ‘LB20304a’ 등 18개 임상 시험중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영화 용어가 있다. 74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조스〉가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퍼진 말이다. 당시 미국의 한 언론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해 ‘대박을 터뜨린’ 영화를 그렇게 표현했다. 텔레비전에 밀려 고전하던 할리우드 영화계는 블록버스터 작전으로 다시 옛 영화(榮華)를 되찾았다.

약에도 블록버스터가 있다. 많은 연구비를 들이지만 일단 개발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하는 약. 바로 ‘신약’이다.

81년 영국의 그락소웰컴 사가 개발한 위궤양 치료제 잔탁이 대표적인 예다. 그락소웰컴은 9년간 1억 달러를 투자해 개발한 이 약 하나로 매년 40억 달러에 달하는 매출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제약 회사로 성장했다. 잔탁을 개발하기 전 그락소웰컴은 영국 제약 업계 서열 25위의 작은 회사였다.

제약 역사가 백년이나 되면서도 변변한 신약 하나 개발하지 못했던 한국. 그러나 최근 SK케미칼이 개발한 ‘선플라주’로 한국도 비로소 신약 제조국 대열에 합류했다. 그 전까지 신약 제조 능력을 지닌 나라는 전세계에 11개국뿐이었다.

LG화학, 신약 2호 탄생하면 돈방석

국민의 관심은 이제 어느 제약 업체가 언제 제2호 신약을 개발하느냐, 또 그 약이 어떤 질병을 치료하느냐에 쏠려 있다. 〈시사저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신약 2호는 올해 안에 탄생하고, 그 자리는 LG화학의 퀴놀론계 항균제 ‘LB20304a’가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LG화학말고는 연내에 신약 개발을 마칠 업체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LG화학은 8월 말 LB20304a 임상 3상 시험을 끝낸 뒤 그 결과를 문서화해 10월 초에 공표할 예정이다. 차질이 없다면 약 두 달 뒤 신약 2호가 탄생하는 것이다.

LG화학은 97년 3천8백만 달러를 받기로 하고 영국의 스미스클라인비첨 사에 LB20304a 개발권을 넘겼다. 신약을 개발해 시판할 경우, 그 매출액의 9%를 로열티로 받는다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LG화학은 시장 규모를 감안할 때 앞으로 연간 5백억원이 넘는 기술료를 받을 것으로 추산된다. LG화학은 또 신약의 원재료를 공급하기로 되어 있어, 여기서도 연간 2백억∼3백억 원의 수입이 추가될 전망이다. 둘을 합치면 연간 순이익 7백억∼8백억 원. 한마디로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는 셈이다.

LG화학의 퀴놀론계 항균제와 더불어 신약 개발을 눈앞에 둔 후보 중에는 동화약품의 ‘미리칸주(DW166HC)’가 있다. 미리칸주는 방사능 물질인 홀뮴과 천연 추출물인 키토산을 결합해 만든 항암제로서, 특히 작은 간암 세포덩어리를 90% 가까이 궤멸시키는 효능을 보이고 있다.

동화약품에 따르면, 미리칸주는 현재 임상 2상의 후기 2상 단계이다. 동화약품 중앙연구소 윤성준 소장은 “오는 12월에 개발을 마칠 예정이었으나 1∼2개월 정도 미루는 것이 불가피하다. 결국 내년에 시판할 수 있을 듯하다”라고 말했다.

동화약품의 미리칸주는 SK케미칼의 선플라주처럼 항암제여서 임상 2상만 마쳐도 신약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외에도 임상 2상을 마치고 신약으로 신고할 수 있는 치료제에 희귀 의약품이 있다.

희귀 의약품의 대표적인 예로는 대웅제약이 사운을 걸고 개발해 온 ‘DWP401’을 들 수 있다. DWP401은 손상된 피부를 복구하는 효능을 지닌 신약 후보 물질이다. 대웅제약 중앙연구소 유영효 수석연구원은 “마데카솔이나 후시딘 같은 피부 질환용 연고가 단순히 세균 침투를 막는 것이라면, DWP401은 피부를 신속히 재생시켜 주는 약효까지 지녔다”라고 자부했다.

DWP401이 희귀 의약품으로 분류된 이유는, 이 약의 적응증(치료 가능한 증상)이 당뇨성족부궤양이기 때문이다. 당뇨성족부궤양은 당뇨병 환자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난치성 질병이다. 당뇨병 환자들은 혈관 안에 당이 많아서 피부에 상처가 생기면 잘 낫지 않는다. 혈관 안의 혈액과 당이 미생물이 번식하는 데 좋은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병은 족부(다리)를 썩어 들어가게 해 절단 수술을 받게 하는 경우가 많다. “1~2년 안에 개발 가능한 신약 8개”

한국에는 당뇨성족부궤양 환자가 많지 않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 자료에 따르면, 2000년 당뇨성궤양 치료제 시장은 25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유럽 등 서방 선진국에서는 당뇨성족부궤양 환자가 5백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리 절단 수술에 소요되는 비용만 2억2천6백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대웅제약은 90년부터 DWP401을 개발해 왔다. 이 약은 적응증 외에도 화상·욕창은 물론 손상된 각막 등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 일단 신약으로 시판되기만 하면 적응증이 아닌 질병이라 할지라도 환자의 동의를 얻어 사용할 수 있어 큰 기대를 걸 만한 약품이다. 대웅제약은 내년 여름쯤 신약을 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한국의 12개 제약 회사들이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는 신약 후보 물질은 모두 18개(68쪽 표 참조). 전(前)임상 시험 단계인 것들까지 포함하면 신약 후보 물질은 39개로 늘어난다.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에 따르면, 임상 시험 중인 신약 후보 물질 가운데 1∼2년 안에 개발이 완료될 가능성이 높은 약품이 8개나 된다. SK케미칼의 선플라주를 신호탄으로 황금 거위들이 줄줄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국내 제약 회사들이 모두 90년대 초반부터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87년 물질 특허가 도입된 이후 국내 제약 업계에는 점점 위기감이 감돌았다. 더 이상 외국 신약을 베껴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이강추 상근회장의 말. “옛말에 약 장사는 아홉 배가 남는다고 했다. 그러나 물질 특허가 도입되면서 좋은 시절이 끝났다. 오티씨(OTC;대중 의약품)를 가지고 좁은 시장에서 과당 경쟁하다 보니 제약 회사들의 수익 구조가 급속히 나빠졌다.” 신약을 개발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개발비 적어 ‘한국 신약’ 꼬리표 못 떼

의약품성실신고조합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제약 회사들의 매출액 증가율은 94년 13%에서 계속 하강 곡선을 그려 지난해에는 3%에 그쳤다. 순이익률은 매출액의 2∼3%대로 떨어졌다. 선진국 제약 회사들의 순이익률이 25∼35%를 기록하는 데 비하면 한심한 수익 구조이다.

세계적 제약 회사들은 매출액의 10∼20%를 연구개발비로 쏟아붓는다. 그에 비해 한국 제약 회사들은 3∼4%, 많아야 5∼6%가 고작이다. 매출액 차이까지 감안하면 선진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잔탁을 개발한 영국의 그락소웰컴은 연간 3조원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하지만, 한국에는 몇몇 대기업말고는 한 해에 백억원 이상 쓸 수 있는 곳이 없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한국 제약회사들이 세계적인 신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선진국에서는 신약을 개발하려면 최소한 천억원 이상 들여야 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SK케미칼이 한국의 신약 1호인 선플라주를 개발하는 데 든 비용은 약 85억원. 임상 2상까지 들인 비용이 그렇다. 차기 신약으로 기대되는 LG화학의 LB20304a도 비슷하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 경제 원리. 신약이 엄청난 이윤을 안겨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뿌린 만큼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고 불린 영화 〈쉬리〉가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타이타닉〉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이라는 ‘우물’ 안에서 거둔 성과일 따름이다. 제작비가 32억원짜리인 영화와 1조원이 넘는 영화가 비슷한 흥행 수입을 거둘 수는 없다.

한국 최초의 신약으로 기록된 SK케미칼의 선플라주 앞에 이른바 ‘국내 신약’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 것도 그래서이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임상 시험 결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약을 수출하려면 다시 임상 시험을 반복해야 한다. 국내 신약은 기술 수출로 활로를 개척해야 할 ‘한계’가 있는 것이다.

LG화학이 LB20304a에 기대를 거는 이유가 그것이다. LB20304a는 영국의 스미스클라인비첨 사가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개발만 되면 월드 드럭(world drug;세계적 의약품)이 된다. 영국에서 개발된 신약은 미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청(FDA)도 공인한다. LG화학의 한 관계자는 “비록 신약 1호 명예는 놓쳤지만 한국이 개발한 ‘세계적 신약’으로는 우리 제품이 1호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LG화학은 왜 그같은 노다지를 스스로 개발하지 못하고 팔아넘겼을까. 이같은 궁금증을 쫓다 보면 열악한 한국의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우선 한국 제약 업체들은 아직 세계적인 신약을 개발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또한 정부 지원·사회 인식 등 주변 여건도 거의 전무하다.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에 따르면, 90년대 들어 10여 년간 한국 제약회사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신약 개발 지원금은 모두 합쳐도 5백억∼6백억 원에 불과하다. 선진국 기준으로 보면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도 못 미치는 액수이다.정부 지원 자금, 올해 겨우 5억원

특히 과학기술부의 G7 프로젝트를 통해 받아 오던 과학기술진흥기금(92∼97년)마저 끊겨 제약 업체들은 더욱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보건 의료기술 개발사업의 하나로 올해 신약 개발 부문에 1백30억원을 지원했지만, 제약 업체들에 돌아간 몫은 30억원뿐이다. 그나마 ‘계속 과제’로 배정된 25억원을 제외하면 새로운 신약 개발에 지원된 자금은 겨우 5억원. 적자를 감수하며 개발에 몰두하는 제약 업체들에 지원되는 정부의 융자금이 고작 이 정도인 것이다.

97년 12월 부도를 내고도 신약 개발에 매달려 온 영진약품은 올해 정부로부터 한푼도 지원받지 못했다. 영진약품이 전임상을 끝낸 위궤양 치료제 ‘YJA20379’는 위궤양 치료에 효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위암의 원인 물질인 ‘헬리코박터 파이로리(H-Pylori)’까지 제거하는 획기적인 약품이다. 위궤양 치료 분야에 최고 권위를 지닌 영국의 그락소웰컴 사가 지난해 영진약품을 인수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G7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이미 8억원을 지원받았을 정도로 유망한 약품이다.

정부가 제약업체들에 지원한 30억원은 그나마 시설비 지원 자금일 뿐, 연구비 명목으로는 한푼도 지원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보건산업정책과 이용흥 과장은 “재특자금은 실체가 없는 대상에 지원하기 힘들다. 연구는 무형 아닌가. 하지만 필요성이 인정되어 연구비에 대해서도 자금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마련한 ‘우수 의약품 안전성 시험에 관한 기준’도 문제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02년부터 GLP(Good Laboratory Practice) 시설을 거치지 않은 전임상 시험 자료는 안전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현재 국내에서 GLP 시설을 갖추고 있는 곳은 LG화학·유한양행·동아제약·한국화학연구소 네 곳뿐이다. 경쟁 업체에서 실험할 수는 없으므로, 나머지 제약 회사들은 사실상 한국화학연구소를 이용한다.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조헌제 R&D 팀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하나뿐인 GLP 시설을 이용하자고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현실은 치열한 기술 개발 경쟁에서 거의 치명적이다. 부득이 해외 유명 임상 기관에 전임상 시험을 의뢰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연구비도 모자라 쩔쩔매는 업체에 GLP 시설까지 요구하는 것은 너무하다.” 그러나 식품의약품안전청 의약품안전과 박전희 과장은 그러니까 3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제약 현실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서로 벌어져 있는 것이다.

정부는 부가 가치가 높은 수출 산업을 집중 지원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어 왔지만, 제약산업은 여전히 정책 관심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제약산업은 올해 비로소 산업자원부에 의해 ‘신산업’으로 지정되었지만 그동안은 전형적인 내수 산업으로 여겨져 왔다.

일본은 6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제약산업을 지원해 온 덕에 10년간(87∼96년) 신약을 1백34개나 개발할 정도로 제약 강대국이 되었다. 여전히 ‘오너 경영’의 문제점이 잔존해 있는 국내 제약 업체들의 분발이 절실이지만, 정부 차원의 지원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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