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다시 찾은 ‘억울한 굴레의 현장’
  • 李文宰 편집위원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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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만의 귀국. 그러나 서울에서 보낸 2박3일은 매우 짧았다. ‘귀휴’처럼 지나가고 말았다. 조국을 배우기 위해 유학했다가 간첩으로 몰렸던 재일교포 김병진씨(45).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에 다니다가 강제 연행되어 보안사에서 2년간 강제 근무한 그는 1986년 2월 일본으로 도피했다. 1988년 보안사의 공작 정치를 고발한 <보안사>(소나무)를 펴낸 그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 중지된 이후 한국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한국 국적인 그에게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 강영미씨와 아들 겨레(16), 딸 나래(13)와 함께 고국을 찾은 그는 서울 시청앞 플라자호텔에 묵었다. 그의 호텔 방 창문으로 청와대가 빤히 바라다보였다. 김씨는 “보안사 출신 대통령 두 사람이 저기에 살았었지”라고 말했다. 1983년 7월 서울 봉천동 자택 앞에서 연행된 그는 재일교포 모국 유학생 간첩으로 ‘만들어지다가’ 공소 보류되었다. 하지만 보안사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살려주는 조건으로’ 1984년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에 6급 군무원으로 특채해 첩보 업무를 담당케 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죄였다”라고 말했다.

1986년 1월31일 보안사를 퇴직한 다음날, 그는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보안사를 고발하고 가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원고지부터 샀다. 아버지 집은 보안사에 노출되어 있어서, 오사카 시내에 한 칸짜리 사글세를 얻었다. 경제 형편도 어려웠다. 밤 11시까지 입시 학원 강사로 일하고, 새벽까지 글을 썼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늘 칼을 지니고 살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보안사> 원고는 아사히신문사 논픽션 공모 담당자 앞으로 보내졌다. 신문사 관계자가 ‘대상감’이라고 말했지만, 우수상으로 뽑혔다. 신문사측은 ‘이 글이 발표되면 서울올림픽을 취재할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보안사>는 일어로 먼저 출판되었고, 한 달 뒤 한국에서 나왔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출판사 사장이 수배되었고, 서점에 배포된 책은 압수되었다. “<보안사>는 부도덕한 권력에 희생된 수많은 혼들과 함께 쓴 책이다”라고 그는 말했다.그동안 그는 줄곧 고국에 들어오고 싶어했다. 정당한 재판을 받기 위해서라도 귀국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국은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이번 그의 귀국은 일본 오사카 시민들의 서명운동이 큰 계기가 되었다. 김씨는 “나에게서 한국어를 배우는 오사카 시민 1천 7백명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시민들이 여비까지 모아 주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20일 오후, 2년간 근무했던 삼청동 입구 보안사 건물을 둘러본 그는 “누구를 미워하겠는가.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보안사 건물 앞을 떠났다(사진). 하지만 14년 만에 다시 찾은 모교 연세대 앞에서는 끝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에서 혼자 많이 울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일본 오사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고베 지진 이후 오사카 생활협동조합에 강좌를 개설한 이래 지금은 두 군데 대학과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 김씨에 따르면,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 학생과 일반 시민의 열의가 대단하다. 과거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김씨는 한·일 시민 교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한·일 시민들의 문화 교류를 위해 자주 왕래하겠다는 그는 “한·일 시민 교류는 낙관적인데, 정작 소외된 재일 동포 문제는 잘 풀리지 않고 있다. 7백만 해외 동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14년 만에 조국을 되찾은 그는 한국어 강사에서 ‘시민 운동가’ ‘문화 운동가’로 거듭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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