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깃발 올린 러시아의 겉과 속
  • 모스크바·윤찬혁 (대우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 승인 1999.04.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인도와 삼각 동맹 움직임… “경제 위기로 입지 한계, 무력 시위에 그칠 것”
나토군 지휘부:웨슬리 클라크 총사령관(왼쪽)과 클라우스 나우만 군사위원회 의장.

‘반전’ 깃발 올린 러시아의 겉과 속
중국·인도와 삼각 동맹 움직임… “경제 위기로 입지 한계, 무력 시위에 그칠 것”

‘러시아-중국-인도를 잇는 전략적 트라이앵글을 결성해 국제 질서의 새로운 축을 형성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나토 연합군이 유고를 공습한 후 인도의 아탈 베하리 바지파이 총리가 나타낸 반응이다. 러시아가 제안하고 중국이 동의하자 마지막 당사자인 인도가 전향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이는 전략적 삼각 연대가 가시권에 들어와 있음을 말해 준다.

인도는 98년 말 프리마코프 러시아 총리가 제시한 전략적 트라이앵글 결성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그 결과 프리마코프는 인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그 제안이 공식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며 한 발짝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 연합군이 유고를 공습하자 러시아·중국·인도 세 나라는 삼각 협력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듯싶다.

그렇다면 유고 공습 이후 가시화한 전략적 트라이앵글은 현재의 국제 질서를 크게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인가. 문제는 전략적 트라이앵글을 제안한 러시아의 입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외환 위기 이후 경제가 바닥으로 추락해 서방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재정 지원 재개 협상, 그리고 뒤이은 서방 선진국들과의 채무 상환 일정 조정이 러시아 경제의 단기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4월2일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 ORT의 심야 평론 프로그램에서 한 평론가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러시아가 이미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35억 달러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국제통화기금과 협상을 마무리할 경우 빠르면 4월 말이나 5월 중 러시아가 받게 될 자금은 1차 지급분이 아니라 2차 지급분이 될 것이다.’

이 평론가는 러시아가 흑해 함대를 분쟁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전군에 비상 경계령을 발령하는 등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으나, 이것이 시위에 그칠 것이라는 반증으로 이와 같은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즉 무력 시위는 국내용일 뿐이며, 러시아가 서방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정치적·군사적 갈등이 심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평론가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가 밝힌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지원 규모이다. 체르노미르딘은 국제통화기금 지원 규모를 최고 80억 달러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현재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 소식통에 따르면 그 규모는 45억 달러 정도이다. 따라서 체르노미르딘이 주장한 대로 80억 달러 가량이 지원된다면, 35억 달러 추가 지원은 정치적 결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우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숫자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옐친·프리마코프 위상 강화… 공산당도 유리

유고 사태 이후 겉으로 드러난 러시아의 반응은 냉전 체제 복귀 가능성마저 시사하고 있으나, 러시아 정치권은 유고 사태가 국내 정치에 미칠 영향과 손익 계산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 러시아는 99년 12월 총선과 2000년 6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격변기를 맞고 있다.

따라서 유고 사태가 가져올 미·러 관계와 국제 질서의 변화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이번 사태가 러시아 정국에 미칠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옐친은 나토군의 공습 이후 관계 장관 회의를 소집하는 등 유고 사태를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옐친은 연두 교서를 발표하면서도 코소보 사태보다는 국내 정치 안정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프리마코프가 주창한 지방 정부 지도자들의 임명직 전환에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점차 세력을 확대해 가는 지방 정부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옐친은 코소보 사태를 통해 가장 큰 것을 얻었다. 막바지로 치닫던 하원의 탄핵 논의가 수면 아래로 잠복함으로써 4월15일 이후의 위기설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크렘린 당국은 코소보 사태를 틈타 눈엣가시 같던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에 대해 한시적 업무 정지 명령을 내리고 그를 무력화하려고 하고 있다. 스쿠라토프는 사임 압력을 거부하고 비리 의혹을 제기하며 옐친 대통령에게 비수를 들이대던 참이었다.

프리마코프는 국제통화기금과의 협상에서 외교 수완을 발휘하고, 유고 사태와 관련해서도 국제 분쟁 해결사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지위가 격상되었다. 옐친은 국제통화기금과의 협상 타결이 지연되고 있다는 구실로 그를 해임하려고 했다. 또 프리마코프는 국내 물자 총동원 체계를 점검하라고 지시하는 등 코소보 사태를 국내 정치 보수화의 기회로 삼으려는 의사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중기적으로는 공산당이 가장 많은 것을 얻을 것 같다. 슬라브 민족에 대한 공습,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이 무시되는 데 대한 자존심 훼손 등을 이유로 현재 러시아 국민 사이에는 반서방 감정이 고조되고 있다. 공산당은 이러한 분위기가 올해 12월의 총선과 내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지속되어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의 반서방 감정이 지속될 경우, 러시아의 양대 선거 결과에 따라 서방은 유고 공습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지 모른다. 특히 유엔의 승인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무력 행사를 감행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러시아의 군사 대국화라는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러시아가 취할 수 있는 카드는 별로 없다. 전략적 트라이앵글을 통해 국제 질서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고, 인도를 앞세워 비동맹 세력을 규합해 외교 공세를 강화하는 것 이외에는 미국을 견제할 별다른 카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