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기 풍어놀이제 지정 보유자 강대형씨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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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을 위해 1년을 살았다. 정월 초하루를 맞은 강대형씨(78·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는 새벽부터 부산하다. 목욕 재계하랴, 장롱에 고이 모셔둔 쇄납(날라리)을 꺼내 손보랴, 강씨 얼굴에는 모처럼 생기가 돈다.

정월 초하루와 이튿날은 황도 붕기 풍어제(충남 무형문화재 제12호)가 열리는 날이다. 안면도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섬 황도에서 2백여 년 전부터 지내 왔다는 붕기 풍어제는, 명맥이 잘 보존되고 있는 몇 안되는 서해안 풍어제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 황도마을에서 붕기를 만들고, 붕기타령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강씨뿐이다. 그가 젊었을 적만 해도 붕기를 만들지 못하면 황도 남자가 아니었다. 해마다 섣달 그믐께면 동사(한 배를 타는 선원)끼리 배에 모여 앉아 붕기를 만들던 일을 강씨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민 대다수가 조기 잡이에 종사했고, 중선만 30여 척에 달했던 그 시절 붕기는 만선(滿船)과 안녕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깃발이었다.

‘붕기 풍어제’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붕기는 풍어제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 길이가 2∼3m쯤 되는 대나무를 여러 갈래로 쪼개 그 가지 끝마다 종이 꽃을 매단 이 붕기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학계에서도 아직 확실히 밝혀 내지 못했다. 붕기라는 명칭 또한 ‘날개 길이가 삼천 리이고, 한번 날면 구만 리를 갔다’는 붕새[鵬鳥]에서 나온 것인지, 봉기(俸旗 또는 棒旗)라는 발음이 변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학교 문턱 밟지 못했지만 붕기 제작은 한국 최고

원래 붕기는 고기를 그냥 많이 잡은 정도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으리만큼’ 잡았을 때 배 뒷머리에 꽂는 것이었다. 따라서 뱃사람들이 풍어제 마지막 날 배에 올라 고사를 지내면서 붕기를 꽂아놓는 것은, 신에게 만선을 비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70년대 들어서면서 조기잡이 시대가 끝나 버렸다. 황도마을의 주된 수입원은 개펄에서 나는 바지락으로 바뀌었다. 붕기를 꽂을 배는 더 이상 없었다. 조기잡이 배는 모두 인근 바다에서 낙지나 잡어 따위를 낚는 배로 교체되었다.

붕기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를 살려낸 것이 강대형씨였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었다. 학교 문턱은 아예 밟아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가지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손재주와 소리 재주가 그것이었다. 그가 만든 붕기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자태를 뽐냈다. 그 비밀은 대나무를 쪼개는 기술에 있었다. 너무 두껍지도 가늘지도 않게 대나무를 쪼개 만든 그의 붕기는 낭창낭창 휘어지면서 화사한 느낌을 주었다.

강씨의 소리 재주는 다른 마을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누구한테 배운 적 없는 소리이건만, 총각 시절 장터에 가면 사람들은 그를 둥그렇게 에워싸고 ‘한자락 하고 가라’며 놓아 주지 않았다. 스물 두 살부터 배를 타면서 그의 소리는 본격적으로 터졌다. 당시 뱃사람들은 꽹과리·징·장구 따위를 배에 싣고 다니다가, 만선이 되면 곧장 풍장(풍물)을 치며 붕기타령을 불러제꼈다. 이때 선창은 항상 강씨 몫이었다.

“한산 세모시 배 포장 치고/황해도 순미영(순명주) 장화만 드려라.”

강씨가 선창하면 동사들은 “허이허이 헤에이 어어으어어/에헤헤에헤 헤에요” 하고 후렴구를 넣었다(타령 가사는 만선을 기념해 새하얀 모시로 배 둘레를 포장 치듯 두르고, 깃대에 명주를 길게 늘어뜨린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붕기타령은 풍어만을 노래하지 않았다. 인생에는 만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한 불안감을 안고 고기잡이를 떠날 때마다 그는 붕기타령을 불렀다. “간다 임아 너 잘 있거라/나 당여오드락(다녀오도록) 너 잘 있거라.” 야박한 배 주인을 비꼴 때도 붕기타령은 안성맞춤이었다. “뱀자(배 임자)네 아지메 신수가 좋아/술동이 밥동이 뒤집어 이고/조판머리서 엉덩춤 춘다.”후계자 아직 못 찾아 갈수록 근심

그러나 조기잡이가 쇠퇴하면서 그의 노래에는 더 이상 흥이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76년 강씨는 황도마을에 왔다가 그의 소리를 들은 유병기씨(당시 대전국악협회 지구장)로부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막상 마을 사람들 반응은 냉담했다. ‘무슨 헛소리냐’는 식이었다. 마을 사람을 하나하나 붙들고 설득하고 애원한 끝에 간신히 대회 참가단(남녀 각 25명)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석 달 동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연습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강씨는 77년 10월26일을 한평생 가장 감격스러운 날로 기억한다. 그 날 황도마을 사람들은 제18회 전국민속경연대회가 열리는 수원 공설운동장에 서 있었다. 대회 참가 초반에만 해도 황도마을 사람들은 시·군 단위로 참가한 다른 선수단의 으리으리한 무대 세트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순서가 되자, 황도마을 사람들의 ‘끼’는 유감없이 터져 나왔다.

축문-붕기타령-들어치기-뱃소리로 붕기 풍어놀이가 이어지는 내내 마을 사람들은 대회 경연장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한판 잘 놀았다’. 그물에 가득 잡힌 조기를 뱃전에 퍼 담으며 부르는 노래 ‘들어치기’를 부를 때는 관중석에까지 신명이 전염된 모양이었다. 앞장서 날라리를 불던 강씨 눈에 얼핏 덩실덩실 어깨짓을 하는 심사위원이 들어왔다.

이 대회에서 황도마을은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총 가구 수가 1백20여 가구 남짓한 작은 섬 황도는 ‘붕기 풍어제의 고장’으로 전국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럼에도 강씨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무겁다. 붕기 풍어놀이를 전수할 후계자를 아직 찾지 못한 까닭이다. 전수 희망자가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죽만 흉내낸다고 붕기타령은 아니다. 그 바탕에는 신을 향해 지극 정성으로 풍어를 빌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강씨는 황도마을을 지키는 당신(堂神) 덕택에 마을이 이처럼 번성했다고 말하곤 한다. 이제까지 마을에 큰 재해가 없었던 것도,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소대원 가운데 자기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당신이 영험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믿음이 젊은 사람들에게 통할 리 만무하다. ‘나 죽으면 붕기 풍어놀이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비단 그만의 안타까움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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