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듀브나이 동국대 초빙교수 ''활쏘기''가 맺어준 한국 역사와의 만남
  • 朴晟濬 기자 ()
  • 승인 2000.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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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고향이 두 곳이다. 한 곳은 그가 태어난 미국 미시간 주이며, 다른 한곳은 그가 즐겨 찾는 한국의 강화도이다. 그는 또 호화롭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공들여 지은 집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는 인터넷 공간에 지은 가상의 집 두 채를, 자신의 실제 생활 공간인 경주의 집만큼이나 끔찍이 아낀다.

그의 이름은 토머스 듀브나이(40). 원래는 전자공학도였다. 1984년 한국을 처음 찾은 그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편지 친구였던 현재의 부인 이문옥씨와 결혼했다. 그 때가 1985년. 2년 뒤 그는 아예 미국에 있던 짐을 꾸려 경주에 정착했다. 그는 동국대(경주 캠퍼스)에서 10년 넘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어렸을 적 토머스 씨의 취미는 양궁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뒤에도 몸이 근질거려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경주 인근에서 양궁장을 찾아 헤맸다. 그 때 누군가가 불쑥 ‘한국의 국궁을 해보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권유했다. 크게 내키지 않았지만 그는 ‘밑져 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경주의 국궁 동아리인 호림원을 노크했다. 그것이 토머스 씨의 인생을 ‘영어과 교수’가 아닌, 전문가 수준 뺨치는 한국학자로 전환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우선 그는 국궁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화살도 화살이려니와, 그런 화살을 들고 다니는 호림원 궁사들의 가족 같은 분위기, 이기적인 경쟁보다는 예의 범절과 화합을 중시하는 ‘국궁 철학’에 흠뻑 빠지게 된 것이다. 약 7년 전 일이다.

국궁을 전세계에 소개하는 홈 페이지, 즉 그의 첫 번째 가상의 집은 이렇게 해서 문을 열었다. 국궁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해다가 소개한 이 집(www.ncmc.cc.mi.us/esl/ korarch)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의 아들 요한(미국명 니콜러스·13세)이 나와서 방문객을 반긴다. 지난해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댄튼힐에서 찍은 사진이, 토머스 씨가 수집한 활(화살) 관련 기록화·풍속화와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요한의 손에 국궁이 들려 있음은 물론이다.

가상 공간에서 자신의 ‘박물관’을 운영하는 외에, 토머스씨는 그동안 ‘국궁 세계화’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활 제작법·국궁 경기 방법 등을 비디오 테이프를 만들어 보급했고, 미국에서 대규모 국궁 대회를 열기도 했다. 전통 활 수집광이기도 한 그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작한 활로는 한국의 활을 따를 나라가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한국의 활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세계 최고라는 것이다.
국궁에 대한 관심은 토머스 씨에게 ‘제2의 고향’인 강화도와 인연을 맺어 주었으며, 그를 한국 근대사, 특히 한·미 관계에서 한 분수령을 이루는 신미양요(1871년)에 관해서는 누구도 깔볼 수 없는 지식을 가진 근대사 연구가로 만들었다.

국궁의 연원을 더듬어 올라가던 그는 한·미간 처음으로 전투가 벌어졌던 신미양요 때 조선군이 실제로 국궁을 사용했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먼저 그는 실제 격전지였던 강화도를 찾았다. 현장을 답사하고, 자료를 뒤지고, 전문가를 찾아다니면서 토머스 씨는 최초의 목표였던 국궁보다 신미양요 그 자체에 더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지난 5년간 토머스 씨는 강화도를 말 그대로 ‘수도 없이’ 찾았다. 때때로 그의 현장 답사에는 전적지 조사 작업을 벌이는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관계자가 동행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신미양요 때 미군이 사용한 수류탄 탄피 조각이나 조선군이 쓴 대포의 파편을 발굴하기도 했다. 세월은 그를 신미양요의 전투 상황에 관한 한, 시간 단위로 전투 상황을 그릴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신미양요 전문가로 만들었다.

한·미 ‘신미양요 후손’들 찾아내 재회도 추진

토머스 씨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1871년 6월 10~11일 양일간 벌어진 전투는 대포와 근대식 총(이를테면 레밍턴 롤링 블록 카빈이 대표적)으로 무장해 화력 면에서 절대 우위에 섰던 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당시 조선군은 형편 없는 수준의 구식 대포와, 사정 거리가 기껏해야 100~200m이고 정확도도 크게 떨어지는 화승총(일명 조총)으로 미군에 대적했다.

하지만 토머스 씨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해군사관학교 박물관 등 관계 기관을 뒤져 찾아낸 일기·전투 상황 보고서 따위 기록에서, 당시 강화도를 수비했던 조선군 장병들이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에게 신미양요는 ‘한국인의 처지에서 결코 잊혀서는 안될 역사적이고도 고귀한 전투’로 이해되었던 것이다.토머스 씨가 애지중지하는 두 번째 가상의 집(www. ncmc.cc.mi.us/esl/1871/index.html)은 따라서 ‘신미양요 전시관’이 되었다. 그는 이 집에,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나 겨우 찾아 볼 수 있는 희귀 자료들을 다수 진열해 놓았다. 그는 또 신미양요의 개요는 물론 당시 미국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 전투 때 사용했던 무기류, 주요 전투 참가자 들에 대한 설명 등 관계 자료를 사진과 함께 수록했다.

토머스 씨는 신미양요와 관련해 최근 몇 가지 중요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미군측이 강화도 광성보(신미양요 최후의 결전지)에서 노획해 현재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인 ‘수(帥)’ 자 기(旗)를 한국에 반환케 하는 일이다. 또 다른 사업은 신미양요 참전 병사들의 후손을 찾아 자매 결연을 맺어 주는 일. 전자는 미국 관계 당국의 무성의로 만족할 만한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지만, 후자는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미 그는 ‘광성보 전투’ 때 고지 점령을 지휘했던 매키 해군 중위(육군 대위에 해당)의 후손을 찾아냈다. 제임스 워드롭이라는 매키 중위의 고조카는 오는 5월27일 강화도에서 열리는 광성제에 참석해,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의 증손인 어윤원씨(87)와 만난다.

신미양요 연구가로서 토머스 씨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모아 늦어도 신미양요 130주년이 되는 내년까지 ‘신미양요 전투 완결판’을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책이 ‘왜 전쟁이 일어났나’를 주로 설명했다면, 나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나’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국궁과 신미양요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토머스 씨. 그는 한국인에게 역사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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