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회(儒道會) 사무국장 최권흥 옹 "공맹 사상에 숨은 ‘위대한 힘’ 찾는다"
  • 宋 俊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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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시류를 거스르지 않는 삶을 ‘순리’라 부른다면, 관습과 유행이 인간 보편의 정의를 지분거리는 시대에는 순리를 좇을 것인가, 거스를 것인가? 이 우문(愚問)을 곱씹게 하는 초야의 학자가 있다.

최권흥. 71세. 호는 중관(中觀). 한학자다. 한학을 하되, 고루한 한학이 아니다. 공부하는 책은 예의 그 고전인데, 그 안에서 다른 가치를 읽는다.

우선 중관의 학문은 한학 뒷전의 ‘눈부신 과거’와 결별한다. 미래 지향이다. 모름지기 학문은 더 나은 세상을 견인하는 데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 중관의 지론이다. 중관은 출세 수단으로 전락한 학문을 개탄한다. 개인보다 여럿, 오늘보다 내일을 위한 공부가 바로 학문의 본질이라는 지적이다. 한문연수원에서 ‘눈 밝은 지도자’ 양성

“요는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있다. 과거 급제가 학문의 목표인 시대가 있었다. 시험→합격→출세…, 그렇게 공부한 지식인 상당수가 당쟁의 주역이 되었다.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 학문은, 사회는, 국가는 어떠한가”라고 중관은 갈파한다.

중관은 사단법인 유도회(儒道會:성균관대 안에 있는 재단법인 유도회와는 별개임) 사무국장으로서, 부설 한문연수원(원장 홍찬유)의 강의도 맡고 있다. 이 한문연수원이 중관 철학의 친위대인 셈인데, 그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장학생반이 그 대표격. 매년 3월 대학원 졸업 이상의 학력자 20명을 선발해 3년간(주 3회, 저녁마다) 무료로 사서 삼경을 가르친다. 올해 모집한 원생이 어느덧 14기째다. 이 반을 거쳐간 교수·교사·언론인이 부지기수다. 빠듯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장학생반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는 데는 중관 사무국장의 신념이 단단히 한몫 하고 있다.

“기상이 곧추선 겨레는 반드시 부흥하고, 정신이 흐트러진 민족은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 처지를 돌아보라. 눈 밝은 지도자를 키워내야 할 때다.”

그런데 왜 구태여 공맹 사상을 배워야만 민족 정기가 바로 선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반대다. 중관은 89년까지 30년간 한글을 가르쳐 온 전직 국어 교사다. 한글 사랑이 남다르다. 그런데도 중관이 한학과 지도자 교육을 강조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주체성 문제다.

소년 최권흥은 7~8년간 서당을 다니다 초등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던 중 광복을 맞았다. 소년에게 광복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나면서 불려온 이름이 가짜였다는 사실, 쓰던 말이 모국어가 아니라는 사실. 이 충격이 이후 중관의 평생을 일관하는 중추 노릇을 맡았다.

“당시 삶이 우리 것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뜬구름 잡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뒤엉킨 일상 속에서 진짜를 가려야 했다. 참고할 책도 자료도 드물었다. 두루마기에 상투, 전통 문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해방 공간에는 민족 지도자의 구호를 따르기도 했다. 다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번에는 양키풍의 홍수였다. 계속되는 혼란의 소용돌이였다.

그래서 전공도 국문학, 나중에는 우리말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전설·민담 등 ‘우리 것 찾기’는 방학 숙제의 감초였다. 그러고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뭔가 직접 찾아 나서야 했다. 그 첫 화두가 ‘왕릉 연구’였다. “한문 제대로 알아야 민족 기상 되살린다”

방과 후나 수업이 없는 날에는 무조건 왕릉에 갔다. 눈과 비를 피하지 않았다. 월급 태반을 택시비로 날리기도 했다. 두루마기 상투 차림에 카메라를 메고 산속을 뒤지다가 간첩으로 오인받은 적도 여러 차례.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료를 정리하고 비문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잘못 알려진 능의 진실을 발견한 것이다. 능의 역사가 왜곡되거나 비문이 오역된 사례가 많았다.

이를 계기로 중관은 한학에 깊이 심취했다. 옛 문자가 전하는 지식과 진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였다. “한문에 눈을 뜨니 글자 뒤에 숨은 진실이 보였다. 그러자 교과서며 숱한 번역서가 고의로, 아니면 무지로 원문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뒤에 왕릉에서 유적으로 답사의 범위를 넓혔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의문이 커졌다. “옛것, 우리것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더라. 고려까지는 그래도 자기 정신을 가지고 산 시대였다. 남을 섬기고 산 조선의 역사는 공부할수록 비통해지는 역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대주의 모화사상을 미화해 오늘에까지 전하는 어용 학문의 폐해다. 어용의 궤변을 막기 위해 부득이 한문을 익히려는 것이다.” 중관의 교육관은 ‘아비의 잘못을 미화하려 들지 말라’는 데서 출발한다. ‘비록 아비는 엉터리 삶을 살았지만 할아버지는 위대했다. 장차 그 위업을 되살리자.’ 이것이 바른 정신이라는 것이다.

중관은 유도회 장학생반과 별도로 기개를 공부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다. ‘한가락’이라는 시조 모임이다. 주1회 우리 역사서를 공부하고, 한 달에 한 번 유적 답사를 떠난다. 4~8시간 걸리는 답사길 버스 안은 한문 낭송 소리가 낭랑하다. 물론 충신·열사처럼 기상과 절개가 드높은 위인의 유적지가 그 대상이다.

답사를 마친 뒤에는 각자 시조를 지어 창을 한다. “시조 창은 중국 한시 창에 대한 반동으로 고려 말 생겨났다. 자주성의 상징이랄 만한 선비 고유의 문학 형식이다.” 90년 4월 처음 모인 이래 매년 연구집 <한가락>을 냈는데 벌써 여덟 권이 되었다. 지난해 4월에는 ‘우리식 고사성어집’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우물물>을 펴냈다. 흔히 쓰는 고사성어가 은연중에 중국의 역사를 학습하는 것을 저어하여, 오랜 조사 끝에 찬술한 것이다.

“한문을 제대로 배워 직접 해독한다면, 민족의 기상을 되살릴 방도가 보일 것이다. 이 기상을 살려내, 문화로 세계를 이끄는 시대를 한번 열어 보자는 것이다.” 중관 선생의 서재에는 오늘도 시조 소리가 낭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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