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선 서울대 교수 “정부, 4자 회담에 집착하지 말라”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7.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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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자 회담은 장기 목표는 될 수 있겠지만, 중·단기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미·북한간 협의가 진행되고, 북한이 한국을 배제하고 있어 4자 회담이 열리기도 어렵습니다. 열린다 해도 실효성 있는 결과를 기대할
최근 북한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경수로 터 인수와 서비스 제공에 관한 의정서에 서명했고, 이 달 말에는 4자 회담과 관련한 3자 설명회와 미·북한간 준고위급 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될 우리 정부는 지난해 4월 미국과 함께 4자 회담을 제안한 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 국제정치학자로서 그동안 한반도 문제에 관해 식견 있는 글을 발표해온 하영선 교수(서울대·외교학)는 근래 논란이 되고 있는 4자 회담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급속히 가까워질 조짐을 보이고 있는 미·북한 관계와 그에 따른 남·북 관계, 나아가 정부의 대북 정책 등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 보았다.

잠수함 사건이 마무리된 뒤 정부는 4자 회담 성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4자 회담은 장기 목표는 될 수 있겠지만, 중·단기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미·북한간 협의가 진행되고 있고, 북한이 한국과의 대화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4자 회담이 열리기도 힘들고, 설사 열린다고 하더라도 실효성 있는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3자 설명회도 북한에 쌀을 주고 미·북한 회담의 격을 높이는 대가를 치르고 개최되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 북한은 3자 설명회에서는 모양만 갖추고, 실질 대화는 미·북한간 준고위급 회담에서 할 것이 분명합니다.

4자 회담은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 당사자와 주변 열강의 보장과 지원이 필요한 이중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4자 회담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4자 회담을 중·단기 목표로 잡고 여기에 집착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럼 한국 정부가 중·단기로 취할 정책은 어떤 것입니까?

북한의 대화 창구는 우리가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선은 열린 채널을 이용해야 합니다. 현재 열린 채널은 남·북한과 미국 간의 기이한 삼각관계이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와 같은 국제 컨소시엄입니다. 미국이 한반도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게 북한과 협상하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한국이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제 컨소시엄을 활용하라는 것은 새로운 지적 같은데요.

북한 체제는 구조에 비효율성을 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에너지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듯이, 구조적 식량난도 국제 컨소시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분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운용 방식과 한국의 중심적 역할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지 여부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은 없습니까?

어떻게 하다 보면 북한이 바뀌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94년 제네바 핵합의 이후 북한이 주적(主敵)이던 미국과 ‘협상’관계로 돌아선 것은, 소련 해체와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지각 변동 때문이었습니다. 남북 관계를 볼 때, 쌀이나 조문 사절단을 보낸다고 해서 북한의 태도가 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북한이 한국 정부와 협상하는 것은 언제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십니까?

현재 북한은 미·일과 관계를 개선하기도 벅찬 상황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북한이 생존을 보장받거나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마지막 수순으로 남쪽과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현재 북한은 미국·일본과 한국에 동시에 개방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시간차를 두고 개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북한 관계 진전은 계속 용인해야 합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반도 문제가 국제화하는 것은 원치 않지만, 현실적으로 남북 관계가 닫혀 있으니 열린 채널을 이용해야 합니다.

올해 미·북한 관계 전망은 어떻습니까?

순풍에 돛 단 듯이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저속 항진은 계속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할 일은 북한 주민까지를 포함하는 한반도 전체의 이익이 미국을 통해 협상 과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한·미 공조 체제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십니까?

공식으로는 한·미 공조에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실제 미국 행정부·의회·언론계의 분위기는 아주 다릅니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가 대단히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고,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북쪽보다 남쪽하고 대화하는 것이 더 어렵고, 70년대 한·미 관계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까지 있을 지경입니다. 한·미 공조 체제를 전면 재검토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국을 한반도 이익의 대변자로 활용하고자 한다면, 대통령·외교안보수석·외무부장관 몇 사람만이 아니라, 행정부·의회·학계·언론계·업계 전반에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일치된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복합적인 한·미 공조가 필요합니다.

미국이 추구하는 이익과 한국이 추구하는 이익 간에 알력은 없습니까?

미국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얘기하지만 핵심은 핵문제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핵말고도 식량 위기가 새로운 위협 요소로 등장했습니다. 식량난 때문에 북한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면 한국이 직접적인 해를 입고, 이것은 동북아의 안정과 번영, 나아가 미국의 이익에도 배치된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입니다. 반면 한국의 목표는 남북 간에 군사 긴장이나 직접 충돌을 막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 통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딜레마는 북한이 한국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데서 발생합니다. 미국은 우선 동북아의 위기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북한과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연락사무소 설치·미사일 수출·미군 유해 송환·쌀 지원, 평화협정이나 잠정협정 체결 등이 대표적 현안입니다. 남북 간에 4자 회담이나 3자 설명회가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서 미·북한 관계 진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북 정책에는 북한 조기 붕괴론이 기본 가정으로 깔려 있습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소프트 랜딩이냐 하드 랜딩이냐’ 라는 성급한 논쟁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토록 심각한 식량난과 경제 위기를 안고 있는 북한은 진작 망했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망하지 않는 이유는 북한 나름의 독특한 생존 방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북한 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은 6개 정도입니다. △대외적으로 국제 역량 강화 △정치적으로 당과 관료 조직 △이념적으로 주체사상 △합법·비합법적인 폭력을 통한 내부 단속 △경제 발전 △대남 비방을 통한 내부적 단결입니다. 이 중에서 무너진 것은 소련이 해체된 후 국제 역량과 국내 경제입니다. 미국은 두 요소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나머지 부분을 간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조기붕괴론이 한풀 꺾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반면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입장입니다. 이제까지 중국은 조기붕괴론에 대해 ‘웃기지 말라’는 태도를 취해 왔는데, 최근 들어 북한이 정말로 어렵다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대북 정책이 일관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은 영원히 북한을 알 수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북한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 체제 성격에 대해서는 영원한 타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한과 협상하면서 우리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외무부로서는 정보를 장악한 미국의 입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반면 안기부는 북한에 대한 제한된 정보를 기존 시각을 갖고 평가하고 있고, 통일원은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기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람직한 것은 상부 기관이 모든 정보를 여과해서 한반도 전체의 이익에 맞게 장·단기 정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할 장치가 없습니다. 최종 결정권자가 전체적인 구도를 갖고 있으면 다행인데, 현실적으로는 그것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따라서 대통령이 어느쪽 보고를 듣느냐에 따라 정책이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는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후임 대통령을 위해서라도 대북 문제와 통일 문제에 관해 미국에까지 충고해 줄 수 있는 틀을 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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