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균 비누`에 속지 말라
  • 전상일 (환경보건학 박사·www.eandh.org) ()
  • 승인 2004.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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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 대학 연구진 “질병 예방 효과 없다”…집에서 쓰면 ‘내성’만 키워
사스·독감과 같은 감염병의 유행과 황사, 그리고 ‘웰빙’ 바람에 힘입어 위생 용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중에는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에 도움을 주는 것들도 있지만, 과학적 근거 없이 사람들의 막연한 불안감에 편승한 제품도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항균(anti-bacterial) 비누와 세제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영국소비자협회 조사에 따르면, 영국 가정의 절반 이상이 이들 제품을 사용하고 있고, 미국에서 팔리는 액체 비누의 76%와 딱딱한 비누의 29%에 항균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항균 제품의 생산·판매가 초기 단계지만, 인터넷 검색창에 ‘항균 비누’라는 단어를 치면 다양한 제품이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며칠 전 세계적 권위를 지닌 학술지(Annals of Internal Medicine)에 항균 비누와 세제의 효능에 관한 연구 결과가 세계 최초로 발표되어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연구진이 뉴욕 주 맨해튼에 거주하는 2백38가구 1천1백78명을 대상으로 항균 성분이 담긴 비누와 세제의 효능을 48주에 걸쳐 조사한 결과, 고열·콧물·인후염·기침·구토·설사·피부 발진·충혈 따위 발생 빈도가 항균 성분이 없는 제품을 사용한 그룹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동안 이들 제품이 ‘과학’이 아니라 ‘상술’이라고 생각해오던 과학자들은, 이번 연구 결과를 내심 반기면서 또 다른 지적들을 쏟아냈다. 우선 소비자들에게 항균 제품에 대한 과신과 ‘항균’이 붙지 않은 유사 제품에 대해 불신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감기를 비롯한 통상적인 감염병들은 박테리아(세균)가 아닌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박테리아를 죽이는 항균 제품들은 이들 바이러스성 질환을 예방하는 데는 효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항균 제품들은 ‘바이러스 사멸’이라는 문구까지 광고에 사용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또한, 박테리아에 의해 유발되는 일부 식중독의 경우 항균 제품이 효과를 발휘할지 모르지만, 식당이나 공공 시설이 아닌 일반 가정에서 평소에 항균 비누나 세제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항균 제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항균 성분에 대한 ‘내성’이나 일반 항생제에 대한 교차 내성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 미네소타 대학 연구진은 대부분의 항균 비누에 포함되어 있는 ‘트리클로산’이라는 성분이 햇빛에 노출되면 독성이 약한 다이옥신으로 바뀌고, 트리클로산에 오염된 물이 정수 과정에서 ‘염소’와 만나게 되면 독성이 더욱 강한 다이옥신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번 연구에 대해 미국 질병관리센터(CDC)의 한 의학 박사는 “어릴 적에 어른들로부터 자주 듣던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는 손으로 가리고 평소에 손을 자주 씻으라’라는 훈계가 과거보다 지금에 와서 더욱 잘 들어맞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필자도 같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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