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의 히딩크 습격 사건
  • 김영근 (<축구아이> 편집국장) ()
  • 승인 2004.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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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직후 격돌…“넌 유럽 못 가” “당신이 안 도와줘도 갈 수 있어”
테헤란을 통곡의 땅으로 만들어 버린 이천수(23·레알 소시에다드). 국내 최초로 스페인 빅리거로 성장한 그는 국가대표 후보 시절에도 골을 넣었을 경우를 대비해 자신의 의사를 ‘언더셔츠’에 기록할 만큼 적극적이며 당돌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10년 이상 한 주방기구 제조업체의 노조위원장을 지냈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부친을 쏙 빼닮아서일까?

이천수가 빅리거로 변신한 과정에는 숨겨진 일화가 적지 않다. 레알 소시에다드 입단 메디컬 테스트를 앞두고 고질적인 어깨 부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통증을 감수하면서 무거운 바벨을 들며 어깨 근육 훈련을 하기도 했다. 이천수의 눈물 겨운 재활 훈련 모습을 지켜보던 고려대 조민국 감독은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돌아서며 정말 지독한 놈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천수는 부평고 시절 최태욱(인천 유나이티드)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나 최태욱에게 가려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 부여된 가장 큰 임무가 최태욱에게 어시스트하거나 공격 포인트를 제공하는 것이었을 만큼 최태욱의 보조 공격수 성격이 강했다. 그런 이천수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시드니올림픽의 분수령인 중국전을 앞두고 이관우가 발목 부상으로 탈락하면서 허정무 감독에게 이천수가 추천된 것이다.

이천수 당돌함에 홍명보도 놀라

당시 올림픽 대표팀에는 와일드카드로 선발된 홍명보가 주장을 맡고 있었으며 스타 선배들이 많이 버티고 있었다. ‘선임 악동’인 고종수조차 훈련 시간을 어기는 일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팀 분위기와 기강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이천수가 합류한 첫날, 팀 미팅을 마치고 홍명보가 막차로 탑승한 이천수를 불러 세웠다. 선배들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라는 취지였다. 이천수는 기다렸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좌중을 한번 휙 둘러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부평의 명물 이천수입니다. 혹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물어 보십시오.”

이천수의 야무지고 당돌한 성품과 면모는 그라운드에서 펼치는 플레이 하나하나에 그대로 묻어난다. 3월17일 이란전에서 기록한 결승골 또한 이천수가 아니면 뽑아낼 수 없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다급하게 달려나오는 이란 GK를 보고 아웃 사이드로 절묘하게 감아 찰 수 있었던 것은 넓은 시야와 정확한 킥 그리고 두둑한 배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조관섭 축구협회 기술위원(풍생고 감독)은 “인 사이드로 차넣고 싶은 유혹을 받을 상황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아웃 사이드로 감아 찰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평가받아야 할 고난도 플레이였다”라고 칭찬했다.

이천수는 스스로 ‘매우 행복한 선수’라고 말하고 다닌다. 덧붙여 “성장 과정마다 좋은 스승을 만났다”라며 고마워한다.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 이천수는 서슴없이 고려대 조민국 감독을 꼽는다. 그 다음으로는 히딩크 감독이다.

사실 히딩크가 ‘간택’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천수가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 히딩크는 이천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유럽 진출에 목말라 하는 이천수에게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히딩크가 이천수를 외면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월드컵이 막 끝나고 이명박 서울시장이 국가대표 선수단을 초청해 조선호텔에서 만찬을 열었다. 와인을 들이킨 히딩크는 보기 좋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로 테이블을 돌며 담소를 나누었다. 히딩크가 모처럼 기자들이 앉아 있는 좌석으로 찾아갔다. 히딩크는 큰 목소리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천수를 불렀다. 그러면서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어은 스위니(당시 코리아 타임스 기자)에게 정중하게 통역을 부탁했다.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히딩크가 말했다. “천수, 너무 착각하지 마, 넌 아직 풋내기야. 잘 명심해.” 통역을 맡은 어은 스위니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원어 그대로 통역하기에는 히딩크의 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매우 과격했기 때문이다. 히딩크는 조금은 황당해 하며 망설이는 스위니 기자를 쳐다보고 통역을 재촉했다. 히딩크의 표정은 진지하지 않았으며 장난끼 넘치는 표정이었다.

히딩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넌 축구에 조금 재질이 있어. 그렇지만 아직 멀었어. 널 데려가겠다는 유럽 팀이 나온다면 내가 막을 거야. 노력하지 않으면 넌 3류 선수에 불과해.” 중간 중간 히딩크의 말을 통역하던 스위니가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서 더 못하겠다”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삼각 대화는 끝났다.

자리를 뜨려는 스위니를 잡아 앉힌 것은 이천수. 이번에는 역으로 이천수가 스위니에게 통역을 신신 당부했다. 그리고 이천수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웃기지 마세요. 난 유럽에 꼭 갈 거예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난 갈 수 있어요.”

그리고 1년 후, 이천수는 장담했던 대로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로 변신했다. 이천수는 지난 3월15일 이란에 입국하며 “팀 승리의 주인공이 될 것이며 꼭 골을 넣겠다”라고 큰소리쳤다. “난 무엇이든 약속하면 꼭 해냅니다.” 이천수의 호언장담처럼 그의 약속이 언제나 지켜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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