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바람 몰고온 ‘신바람 장율경영’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7.12.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LG그룹, 실무진에 전권 주는 ‘자율 경영’ 도입… 팀 경쟁 통해 생산성 높여
회사가 잘되려면 회장보다는 사장이, 사장보다는 사원이 뛰어야 한다. 어떻게 뛰게 할 것인가. LG는 평상시 체제로는 생산비 10% 절감도 어렵지만, 신바람이 나면 한꺼번에 50~60%를 절감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자율 경쟁 체제를 도입했다.

확실히 LG는 불황기 때 돋보인다.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장형’같은 듬직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제자리를 지키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LG의 소리 없는 전진이 지금 ‘찬바람’에 흔들리는 다른 그룹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LG는 2000년까지 연구 개발(R&D)에만 6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LG는 삼성·현대와 달리 해보지 않은 업종에는 진출하지 않는다. 전기·전자와 화학처럼 익숙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것이 구본무 회장의 비전이다. 차세대 디스플레이와 AIDS 치료제 등 세상에 나온 바 없는 물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재계 관측통은 96년 3월, 구본무 회장이 매출 3백조원을 달성해 세계 초우량 기업이 되겠다며 ‘도약 2005’를 선포한 때를 기점으로 하여 LG가 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때는 뼈를 깎는 듯한 개혁 작업이 상당 부분 진척된 상태였다. LG는 89년 이미 변신에 착수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89년 6월 매스컴을 장식했던 금성사 창원공장의 분규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까지 노사 분규는 현대와 대우의 전유물이었다. 사람들은 창원 시내 한복판에 시뻘겋게 불꽃이 타오르는 가운데 금성사 노조원이 투석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럭키금성에도 노조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듯했다. 이때 가장 초조했던 사람은 구자경 회장(현 명예회장)이었다. 69년 국산 1호인 ‘백조 세탁기’를 생산한 이래 가전 분야에서 20년간 유지해온 ‘1위 금성’의 신화가 89년 삼성전자에게 무참히 깨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그룹에서 가장 규모가 큰 창원공장에서 장장 40일을 끈 그 해 최대의 노사 분규가 일어났으니, 참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사회의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는 시장 개방이었다. 시장이 개방되면 국산 가전품은 전멸할 것이라는 보도가 많았다. 86년 개방한 대만에서는 다퉁(大同)과 삼포(聲寶) 등 대표적인 가전사들이 일본 가전회사에 모두 무너졌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내우외환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현장 순시를 가면 한결같이 ‘잘 되고 있다’고 보고하는데 왜 추락하는가? 구회장은 자신이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사실을 직시했다.

어느 회사나 근사한 액자에 사시(社是)를 걸어놓고 있다. 그러나 대개 박제된 구호일 뿐이다. ‘인화 단결·연구 개발·개척 정신’이라는 럭키금성의 사시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고객은 왕이다’. 구회장은 고객의 처지에서 그룹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기로 했다. 90년 3월 그는 개혁의 첫출발로 경영 이념을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와 ‘인간 존중의 경영’으로 바꾸었다. 이어 고객과 협력 업체 직원 7백명을 대상으로 ‘럭키금성이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인가’를 조사했다. 숱한 불만이 쏟아졌다. 한마디로 럭키금성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다 누리고 난 여분으로 고객과 협력 업체를 대한다는 것이었다. 금성사를 비롯한 그룹 각사가 가전 분야 등에서 국내 1위라는 지위에 안주해 왔음도 여실히 드러났다.

살 길은 하나였다. 고객을 만족시키는 세계 최우량 기업으로 주력사를 키우는 것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회장보다는 사장이, 사장보다는 사원이 뛰어 주어야 한다. 어떻게 뛰게 할 것인가. 구회장은 한국 사람은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책임과 권한을 함께 주면, ‘신바람’이 나서 이를 쟁취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신바람 나는 자율 경영뿐이다. 나는 사장단에 전권을 이양하고 자율 경영 전파에만 전념한다.’ 그는 이렇게 작심했다.

“빈대 있으면 초가삼간이라도 태우라”

노사 분규를 겪은 뒤의 창원공장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이헌조 사장(현 LG인화원 회장)이 자율 경영을 발휘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리더십이란 말이 아닌 행동이다. 이사장은 관리직 사원들을 먼저 출근시켜 청소하게 한 후, 정문에 서서 출근하는 생산직 사원들을 향해 인사하게 했다. 생산직 사원들은 ‘웃기네. 며칠 가나 보자’는 표정으로 냉랭하게 지나쳤다. 그러나 이 인사는 석 달간 계속되고, 이후 바뀐 모습으로 2년간 지속되었다. 이사장은 화장실에서부터 공장 순시를 시작했다. 생산직 사원들이 이용하는 화장실은 깨끗해졌다. 한국에서는 역시 음식을 나눠 먹어야 가까워진다. 경남지역을 책임진 이호근 전무는 주머니 가득 오징어를 넣고 다니다 생산직 사원을 보면 오징어 다리를 내밀고 말을 붙였다.

한편으로는 불량품을 줄이는 작업을 병행했다. 이헌조 사장은 ‘빈대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초가 삼간을 태우라’고 지시했다. 이후 공장마다 반품된 불량품을 모은 전시회가 열렸다. 이사장은 사람은 기본에 철저해야 한다며 ‘빨간 불이면 무조건 라인을 세우라’고 교육했다. 이후 조립 공정이 불량할 때 사원 스스로가 생산 라인을 세울 수 있는 ‘라인 스톱제’가 국내 최초로 도입되었다. 그는 노조위원장도 회사의 사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사장과 함께 업무 브리핑을 받도록 했다. 이어 같은 회사원인데 무슨 노사 관계냐며, 노경(勞經:노동자와 경영자) 관계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화불단행(禍不單行), 89년부터 달러화의 가치가 8백원대에서 갑자기 6백원대로 떨어졌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수출하기가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반도체로 떼돈을 번 삼성전자가 주요 가전품의 가격을 대폭 인하했다. 새로 창원공장을 맡은 김쌍수 전무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3 BY 3’ 전략을 주창했다. 80년대 3백엔대이던 달러화의 가치가 백엔대로 떨어졌음에도 일본의 수출력이 살아 남았듯, 금성사 역시 3년 사이 환율이 3분의 1로 떨어져도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자며 ‘3 BY 3’을 선포한 것이었다.

‘3 BY 3’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원가를 매년 46%씩 낮춰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력이 LG에 있는가였다. 김전무는 한국인은 평상시 체제로는 생산 비용을 10%도 절감하지 못하지만, 신바람이 나면 한번에 50∼60%를 절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내 가전 시장, 외국 업체 장악 못해

그때까지만 해도 설계팀은 설계만 하고, 생산팀은 생산만 했다. 김전무는 자재·설계·생산·영업 직원 중 최고 엘리트들을 뽑아 전권을 주고 Vic21 팀을 구성했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원가를 46% 이상 내리고도 품질이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Vic21 팀에 일임했다. 시간이 지나자 Vic21 팀 간에는 경쟁이, 팀 내부에는 신바람이 일었다. 여기서 쏟아진 ‘걸작품’이 통돌이 세탁기와 김장독 냉장고·물걸레 청소기 등이었다. 이로써 금성사도 삼성전자의 가격 파괴에 당당히 동참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출품은 대개 내수용을 개량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국 소비자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더구나 미국은 한국보다 가전품이 싼 곳이라 국내 업체들은 명분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적자 수출을 하는 실정이었다. 김전무는 또다시 Vic21 팀을 만들어 미국 시장에서도 살아 남을 제품을 개발하라고 주문했다. 그 결과 원하는 가격대의 수출용 모델이 탄생했다. 지금 LG전자는 운동화 한켤레 값인 60달러짜리 전자레인지를 미국 시장에 내놓고도 흑자를 보고 있다. 에어컨 한 품목만으로 2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끝에 LG전자는 마침내 국내 시장에서도 1위를 탈환했다. 한국 가전업체 간의 치열한 경쟁은 국내 시장을 지키는 데도 큰 몫을 했다. 한국에 상륙한 일본과 미국의 가전제품은 대만에서와 달리 틈새 시장을 형성했을 뿐이다.

95년 취임한 구본무 회장은 그룹 이름을 LG로 바꾸고 더 분명하게 자율 경영을 하기 위해 ‘도약 2005’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세계화 시대에 LG가 살아 남으려면 이것저것 벌일 수 없다며 ‘선택과 집중’을 강조했다. 경쟁력이 있는 부문은 세계 1,2위를 다투도록 집중 육성하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정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그는 그룹내 사업을 ‘승부 사업’ ‘돈 버는 사업’ ‘합리화 사업’으로 구분했다.
승부 사업은 LG가 앞으로 사활을 걸고 집중 투자할 분야이다. 구회장은 LG가 화학과 전기·전자 분야에 강한 만큼 이쪽에 주력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멀티 미디어와 정보통신·차세대 반도체·디지털 텔레비전, 그리고 신약·신물질을 개발하는 유전공학에 집중하기로 했다.

돈 버는 사업은 승부 사업을 받쳐주는 돈줄이다. 승부 사업이 성공할 때까지 이들이 맷집을 유지하지 못하면, 승부 사업에 대한 과다한 투자 때문에 그룹이 무너진다. 따라서 돈 버는 사업 역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올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2천1백명의 직원으로 7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LG정유는 대표적으로 돈 버는 사업이다. LG전자· LG반도체·LG화학 등 주력 사업체도 구조 조정을 해 돈 버는 사업체로 살아 남아야 한다.

합리화 사업이란 과거에는 돈을 벌었으나 지금은 돈만 까먹는 업종이다. 그러나 합리화 사업체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제2의 창원 사태’가 일어날 수가 있다. 때문에 ‘살생부’를 공개하지는 않되 스스로 정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LG전자는 카메라 제조업에 진출했으나 스스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95년 현대전자에 카메라 부문을 넘겼다. LG정보통신 역시 무선 호출기 제조 분야를 한 중소업체에 이전했다.

직원들은 합리화 사업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눈치껏 알아챘다. 불경기일 때 다른 기업에 매각되면 어찌될 것인가. 이같은 위기 의식은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돈 버는 사업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충로 전무가 이끄는 LG화학 청주공장의 ‘공정 파괴’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공장에는 LG전자의 Vic21팀과 유사한 스킬(Skill)팀제가 운영된다. 96년 구성되었다고 해서 ‘병자대란팀’으로 명명된 한 스킬팀은 6개 공정으로 된 분말 세제 공정을 단 2개 공정으로 단축해 사업을 흑자로 전환시켰다.

96년 9월 유럽에 간 LG화학 성재갑 부회장은 그곳의 PVC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LG화학을 비롯한 한국의 PVC 제조업체들은 가격이 너무 낮아 수익이 많지 않은데 유럽의 PVC 제조업체는 낮은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이익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LG화학의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다’ 고 생각한 성부회장은 귀국 직후 비상경영위원회를 소집해 LG화학을 세계 10대 화학 업체로 발돋움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공정 별로 46개 TA팀을 만든 후 팀장에게 자율 경영권을 주고, 98년까지 말까지 맡은 부문을 세계 최고로 끌어올리라고 명령했다. 98년 목표에 도달한 부문은 이후에도 집중적으로 키우지만 그렇지 못한 부문은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성부회장은 세계화 시대에는 양적인 팽창 또한 중요하다며 중국을 제2의 내수 시장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어 동남아·인도·미국·유럽에도 진출해 해외 5극 체제망을 구축할 예정이다.

돈 못버는 사업 과감히 정리 ‘배수진 경영’

돈 버는 사업을 지향한 LG화학의 이런 결정은 새로운 구조 조정 방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합리화 사업’이 된다는 절박함이 ‘배수진 경영학’을 낳은 것이다. 이는 발상을 전환하게 하고 돈 버는 사업으로 재탄생하게 한다. 자율 경영은 자유 방임이 아니었다. 신바람을 일으켜 경쟁을 극대화하는 한국식 경영법이다.

지금 한국 경제가 겪고 있는 혹독한 시련은 개발 연대 시절의 인식 체계를 제때에 세계화 시대의 인식 체계로 전환하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다. 대우그룹은 우리보다 산업화가 늦은 나라를 찾아감으로써 인식 체계 전환에 필요한 시간을 버는 세계 경영을 선택했다. 그러나 LG는 ‘신바람’이라는 한국인의 정서를 이용해 인식 체계 변화에 정면 대응한다는 자율 경영을 선택했다. 자율 경영은 위기 의식이 강할 때 더욱 단결하고 집중하는 한국인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대개는 ‘실패는 실패의 어머니이고, 성공은 성공의 어머니’이다. 불황의 골이 깊어질수록 LG가 돋보이는 것은 이러한 성공 때문일 것이다. ‘자율 경영’에서 ‘도약 2005’로 이어지는 LG 경영층의 절묘한 선택이 믿을 만한 LG를 만들고 있다.

‘사랑해요 엘~지’라는 광고 문안대로 LG는 불황기일수록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