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땅에 참교육 심은 맥타가트 교수
  • 대구·朴晟濬 기자 ()
  • 승인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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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잘 아는 사람, 특히 그에게서 도움을 받았거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그에 대해 ‘한마디로 매우 특별한 분’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가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외국인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거나, 이미 여든 살을 넘긴 고령임에도 아직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성가실 정도로 자주 들으면서도 평생 독신을 고집해 왔다는 점 따위는 그의 특별함을 설명해줄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실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특별함은 그같은 구체적인 사실의 저 너머에 있었다. 최근 정년을 맞아 대학 강단에서 물러난 그의 제자 정명진 교수(연세대·영문학과)는 그가 왜 특별한가라는 질문에 또 하나의 설명을 추가하면서도 끝내 말끝을 흐렸다. “열심히 남들을 돕기는 하지만 도무지 받으려 들지는 않으신다. 특별한 건 분명한데, 글쎄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도 그렇고….” 정교수의 대답에는 평생 잊지 못해온 한 자락 추억이 스며 있다. 정교수는 6·25가 끝난 뒤 대구에서 아픈 몸을 무릅쓰고 공부하면서, 스승이던 그에게서 요양비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물질적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아서 조셉 맥타가트 교수(82). 20년 이상 재직해온 대구 영남대와 대구 사람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에게 그는‘맥 선생님’ 또는 ‘맥 교수’로 알려져 있다. 그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때는 53년 6·25 종전 직후. 당시 미국 국무부 소속 외교관이었던 그는 임시 수도 부산으로 잠시 옮겨간 미국대사관에 취임했다. 맥타가트는 대학 때 사귄 친구가 수필가 이양하씨(작고)와 장 발 교수(전 서울대 미대 학장)에게 써준 소개장 덕분에 한국의 유명 인사와 교류할 계기를 얻었지만, 입국할 당시 ‘바로 얼마 전 휴전한 나라’라는 사실 외에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54년 대사관이 서울로 옮기면서 나도 서울로 가게 됐다. 56년 본국에서는 또 다른 명령을 내렸는데, 대구로 내려가 그곳의 미국문화원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라고 그는 회상한다.

56년 대구는 말 그대로 종전 직후의 혼란함 속에서 사람들이 그저 주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해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맥타가트는 그 춥고 배고팠던 시절, 대구를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키우는 든든한 후원자 노릇을 했다. 전쟁을 피해 대구로 내려온 예술인들은 맥타가트의 주선으로 대구 미국문화원 한귀퉁이를 빌려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담뱃갑 종이나 폐지 쪼가리에 걸작을 남긴 화가 이중섭도 끼어 있었다. 다시 맥타가트의 회고. “종이가 귀하던 시절, 이중섭씨가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그림을 뉴욕 화랑에 보낸 적도 있다.”

2백여 제자들, 장학회 만들어 ‘은혜 대물림’

16㎜ 이동 영화를 돌리고 〈자유의 종〉이라는 피난민 대상 신문을 발간해 배포하는 외에, 틈틈이 대구대·청구대 등에서 강의까지 하는 사이에 3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그 사이 숱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대구 미국문화원을 통해 예술혼의 명맥을 이어갔다. 문단의 최상덕 구 상 박영준 정비석 김동진 씨가 그랬고, 테너 이장환, 피아니스트 김춘명 이공주 씨도 대구문화원에서 발표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항상 맥타가트가 있었다.
또 한 차례의 서울 생활(1960~1964년),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공보관 생활(1964~1975년)을 마치고 맥타가트가 다시 한국에 나타난 때는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76년 9월이다. 미국 국무부 인사 규정에 따라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이번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대학 교수가 되어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것은 동시에 독재 정권에 핍박받고 빈곤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에게 ‘마냥 베풀고 퍼 주기만 하는 삶’이 재개됨을 뜻하기도 했다. 그는 월급을 털어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대고, 강의 시간을 쪼개 부지런한 제자들 뒷바라지에 열을 올렸다.

83년 맥타가트 교수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 미주리 주립 대학과 뉴욕 주립 대학 스토니브룩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오성현씨(로고스도서주식회사 대표)는 맥 선생이 거느린 ‘제2 세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내가 어르신을 만나뵌 것은 군을 제대하고 복학했던 77년 봄학기였다. 나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대구 지역 대학생·사회인 들이 모여 만든 영어 연구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어르신은 밤늦게 강의를 끝내고도 나에게 들러 우리가 수집한 자료를 교정해 주셨다. 물론 나는 대학 재학 때 맥 박사의 장학생은 아니었지만, 물심 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처음 한두 해 동안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지급되던 맥타가트 교수의 장학금은 대학 당국의 요청에 따라, 3년 뒤부터는 공개적으로 지급되기 시작했다. 돈은 맥타가트 교수가 내고, 장학생 선발은 대학측이 맡았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맥타가트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은 모두 합쳐 2백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이들은 ‘우정장학회’라는 이름을 붙인 친목 모임까지 만들었다. 이 모임은 곧 재단을 구성해 장학회를 발족할 예정이다. 맥타가트 교수의 은혜를 자기네만 받고 끝낼 것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대물림하자는 뜻에서다.

골동품 수집 등 취미 생활에 들이는 일부 비용을 제외하고는 수중에 있는 돈을 제자들 뒷바라지에 몽땅 털어넣는 바람에 맥타가트 교수의 생활은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검소하다. 그는 대학측이 제공한 13평짜리 낡은 아파트에서 그의 유일한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제자들과 함께 손수 밥 짓고 빨래하는 ‘자취 생활’을 하고 있다. 출퇴근 때 이용하는 교통 수단 역시 대학측이 운영하는 셔틀 버스다. 맥타가트 교수가 가장 설명하기 곤란하다고 고백했던 ‘미혼 사유’에 대해 묻자 그는 “바쁘다 보니…”라는 짤막한 대답으로 대신한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영남대 강단을 떠나게 될 맥타가트 교수는 스스로 천직으로 알고 매진해온 ‘선생 노릇’에 마지막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76년 9월 임용 기간에 대해 학교측과 합의했던 ‘쌍방이 필요로 하고 원할 때까지’라는 조건이 마침내 효력을 발휘할 시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맥타가트 교수는 대학을 떠난 뒤에도 미국 인디애나 주의 자기 고향 롱건스포트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지켜본 산 증인으로서,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고락을 함께했던 친구로서, 그리고 제자들에게 더없이 자애로웠던 스승으로서 맥타가트 교수는 제2의 고향 한국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정리하려 한다. 한국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정도로 오래 머무를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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