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삭은 젓갈로 김장 김치 맛깔지게
  • 金在泰 기자 ()
  • 승인 1997.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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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만난 강경·소래 시장 ‘북적’
찬바람이 불면 주부들의 마음은 바빠진다. 겨울나기 준비도 그렇고, 김장도 부담스럽다. 아이들까지 합세해 동네 잔치 벌이듯 왁자지껄하던 김장 담그기 풍속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봉지 김치’가 메우고 있지만, 손맛 담긴 포기 김치 한 접시쯤 상에 올리고 싶은 것이 주부들의 심정일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주부의 연령이 낮을수록 김치를 사서 먹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는 김장 담그는 방법을 모르는 젊은 주부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도 40대 이상 주부들 가운데는 직접 담가 먹는 경우가 많다. 다만 예전처럼 몇 백 포기씩 담그던 ‘대량 생산’광경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김장 담그는 주부들을 위해 농림부는 매년 그 해의 김장 비용을 추산해 발표한다. 농림부가 제시한 올해의 김장 비용은 4인 가족을 기준하여 11만2천원.

김치의 맛을 내는 데는 배추나 무 같은 주재료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속’을 이루는 부재료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부재료 중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젓갈이다. 김장철이 되면 알뜰 주부들이 맛좋고 값싼 젓갈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삼국 시대부터 발달…현재 30여 가지 전래

그 모습은 지난 11월20일과 27일 서울을 출발해 충남 강경으로 향한 ‘젓갈 열차’ 안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4백여 명이 객실을 가득 메웠고, 그들 대부분은 배낭이나 가방을 든 주부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매, 시어머니와 동행한 주부 등 구성원도 다양했다. 그들이 당일치기 젓갈 여행에 참가한 이유는 단 하나, 강경 젓갈이 맛좋고 싸다고 소문났기 때문이다.

내륙에 있으면서도 서해와 금강 줄기로 이어진 강경은 예로부터 젓갈 시장으로 명성이 높다. 20여 호의 크고 작은 상점마다 갖가지 젓갈이 다 구비되어 있지만 특히 김장 젓갈로 많이 쓰이는 새우젓이 유명하다.

옛날 서울 마포 나루의 새우젓 추억을 되살리려고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젓갈 열차를 탔다는 이명자씨(57·서울 개봉동)는 새우젓과 조개젓 3만원어치를 산 뒤 “강경 젓갈은 값이 싼 데다 덤도 푸짐하게 얹어줘서 좋다”라며 즐거워했다. 서울 반포에서 같은 동네 주부들과 함께 온 이금순씨(49)도 “강경 새우젓과 황석어젓 맛이 기막히다. 값도 서울 대형 할인점 값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내년 김장철에도 꼭 다시 오겠다”라고 말했다.
강경 젓갈 시장 상인들이 말하는 이곳 새우젓 맛의 비결은 적당한 염도와 숙성 기간이다. 인근 대둔산 토굴에서 3개월 이상 묵혀 감칠맛을 낸다는 것이다. 가격은 오젓(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과 추젓(가을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이 품질에 따라 ㎏당 2천∼5천원, 고급품인 육젓(6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이 최고 2만원까지 한다. 강경 광천상회 주인 나호진씨는 “김장용으로는 오젓이 가장 낫다. 새우젓을 살 때는 잘 익어서 국물이 노랗고 새우에서 붉은 빛깔이 나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라고 권한다.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 소래 포구도 김장용 젓갈을 싸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소래 젓갈 시장에서도 가장 흔한 것이 새우젓. 김장 대목에는 한 가게에서 하루에 몇 드럼씩 팔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 이곳 젓갈 시세는 ㎏당 오젓 3천원, 추젓 5천원 선이고, 육젓은 7천원이 넘는다. 그밖에 멸치젓은 10㎏에 만원, 까나리액젓은 5㎏에 만원, 황석어젓은 4㎏에 만원, 밴댕이젓은 4㎏에 6천원, 조개젓은 ㎏당 만원 선이다.

김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이자 밥 반찬으로도 독특한 풍미를 내는 젓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저장 발효 식품으로 꼽힌다. 어패류의 살이나 알·창자를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것으로,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만도 30여 가지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새우젓과 멸치젓. 김장용으로 가장 흔히 쓰이는 이 두 젓갈은 전체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황석어젓(일명 조기젓)도 김장 때 애용되는 젓갈이다. 최근 들어서는 까나리액젓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지방에 따라서는 갈치속젓이나 굴젓을 넣어 김치를 담그기도 한다.

이밖에 명란젓·창란젓·어리굴젓·참게젓은 고급 반찬으로 쓰인다.

생선살·밥·엿기름 섞은 ‘경상도 밥식해’ 별미

젓갈이 이처럼 우리 식탁에서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독특하고 구수한 향미 때문이다. 맛있는 젓갈 한 접시만으로 밥을 다 비울 정도로 입맛을 돋우는 데는 그만이다. 젓갈이 구수한 맛을 내는 이유에 대해 서정숙 교수(서울보건전문대·식품영양과)는 ‘젓갈 속에 함유된 유리아미노산과 핵산 분해 산물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 젓갈에는 단백질·칼슘 등 영양소도 풍부하다. 서교수는 젓갈의 단백질 함량이 10∼25%로 곡류 식품보다 많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젓갈은 삼국 시대부터 지방마다 독특한 형태로 발달해 왔는데, 지역 별로 많이 잡히는 수산물과 소금 생산량이 달랐기 때문이다.

서해를 끼고 있는 경기도 지역에서 바지락젓(일명 조개젓)과 밴댕이젓이, 충청도에서 어리굴젓이, 전라도에서 참게젓과 황석어젓이, 강원도에서 오징어젓·명란젓·창란젓이, 제주도에서 자리돔젓과 오분자기젓이 발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소금이 귀했던 경상도 지역에서는 소금 대신 밥에 생선살을 섞어 엿기름과 전분으로 발효시킨 밥식해 같은 독특한 젓갈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또 충청도 지역에서는 게가 옆으로 걷는 동물이라 하여 게젓이 상에 오르는 것을 금기로 여겨 왔다.

그러나 이런 지역 특성도 시대의 변천과 함께 많이 퇴색하고 있다. 서혜경 교수(전주대·가정교육과)는 “젓갈의 발달은 수산물 어획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새우알젓처럼 재료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워 자취를 감춘 젓갈도 많다. 또 교통이 편해지고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멸치젓이나 새우젓이 지방 특산물이 아닌 전국적인 젓갈로 자리잡는 현상이 나타났다”라고 말한다.

김치 속에서, 혹은 접시 위에서 우리의 식탁을 오래도록 풍요하게 해온 자연 조미료 젓갈. 온갖 즉석 식품이 판치는 세태에서 그 전통의 맛은 여전히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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