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봄, 여름은 성큼…엘니뇨 현상 극성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8.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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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뇨 현상 갈수록 극성…기후의 재앙 ‘예측 불허’
기상청 만큼 봄을 두려워한 곳도 없을 것이다. 지난 2월 ‘올봄은 예년에 비해 조금 덥겠고, 비는 비슷하게 내리겠으나 지역 간에 차가 크겠다’는 전망을 내보낸 상태였으나, 상황은 불투명했다.

원래부터 봄은 ‘예보관 울리는 계절(spring predictability barrier)’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을 만큼 기상 변동이 불규칙하다. 그러나 올해는 또 다른 복병이 숨어 있었다. 엘니뇨는 올 들어 기세가 꺾일 것이라던 일부의 예측과 달리 3월까지도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아니나 다를까, 기온이 예년보다 높고 봄 가뭄도 없으리라는 기상청 전망은 전반적으로 맞았지만 그 강도는 예상을 크게 넘어섰다. ‘아무리 더워도 설마 4월에 기온이 25℃를 넘으랴’ 하면 수은주가 29℃(4월11일 영월관측소)까지 올라갔다. ‘설마 장마도 아닌데 하루에 비가 80㎜ 넘게 오랴’ 하면 100㎜ 넘는 비가 쏟아졌다(4월1일 제주관측소). 4월 들어 같은 달 역대 최고 기온을 갱신한 관측소만 네 군데, 최고 강수량을 갱신한 관측소는 다섯 군데에 이른다(4월13일 현재).
여름 같은 봄. 최고 기온이 20℃를 오르내리는 날씨가 1주일 가까이 계속되자 제철 아닌 풍경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22∼23℃ 날씨에 비로소 성수기를 맞는다는 아이스크림과 맥주가 불티 나게 팔리는가 하면, 백화점들은 앞 다투어 봄철 정기 바겐세일에 ‘여름 상품 특가전’을 끼워 넣었다. 이른바 ‘엘니뇨 패션’까지 등장했다.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7부 소매, 무릎과 발목 중간 길이의 버뮤다 팬츠 등 봄옷도 여름옷도 아닌 ‘준(準) 여름’ 패션이 유행을 탄 것이다.

기상 이변의 징후는 겨울부터 이미 나타났다. 유난히 포근한 날씨가 계속된 지난 겨울 영동 지방은 폭설, 제주도는 집중 호우에 시달렸다. 지난 1∼2월 영동 지방에 내린 세 차례 폭설은 7백 명이 넘는 이 지역 주민을 이재민으로 만들었다. 같은 기간 제주도에는 100㎜ 넘는 비가 두 차례나 내렸다(1월8∼9일 제주도 성산포에 내린 비는 무려 133㎜였다), 서울·경기 지역에는 한겨울에 난데없는 천둥·벼락이 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상청 박정규 서기관(예보국)은,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예보관들이 예보 감각을 거의 잃을 정도였다고 표현한다. 이같은 기상 이변을 부른 1차적 요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엘니뇨였다.

엘니뇨(El Nino)란 열대 태평양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해수면 온도가 평년에 비해 2∼3℃ 정도 높아지면, 이것이 대기에 영향을 미쳐 전세계 기후를 뒤틀어 놓는 현상을 말한다. 반대로 해수면이 차가워지는 라니냐(La Nina) 현상도 있다.

한국은 엘니뇨 ‘무풍지대’ 아니다

주기적으로 번갈아 등장하는 이 ‘뜨거운 남자 아이’와 ‘차가운 여자 아이’(엘니뇨와 라니냐는 에스파냐어로 각각 ‘남자 아이’‘여자 아이’라는 뜻이다)’에 대해 한국에서는 2∼3년 전까지만 해도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제까지 엘니뇨 때문에 큰 피해를 본 일이 없다고 여겨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82∼83년 전세계에 1백30억 달러가 넘는 재산 손실을 입힌 초대형 엘니뇨가 발생했을 때에도 한국은 오히려 평년보다 풍작을 기록했다.
이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이다. 얼마 전 김정우 교수(연세대·대기과학과)는 지난 50년간 한반도에서 엘니뇨가 있었던 해와 그렇지 않았던 해의 강수량을 비교했다. 그 결과 김교수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엘니뇨 해에는 장마가 시작하는 시기가 6월 중순에서 7월 초로 10∼15일쯤 늦어졌다. 이른바 ‘쌍봉(雙峰) 곡선’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쌍봉 곡선이란 여름 비가 1차 우기(6월 초∼7월 말)와 2차 우기( 8월 중순∼9월 말)에 집중되면서 나타난 한반도의 전통적인 강수 모델이다. 그런데 <그림 4>에서 보는 것처럼 엘니뇨 해에는 1차 우기가 뒤로 이동하면서 1·2차 우기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여름철 강수량도 전반적으로 줄어들곤 했다.

기온 또한 엘니뇨가 나타난 해에는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강인식 교수(서울대·대기과학과)가 35∼95년 60년간 기온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엘니뇨는 봄·가을보다 여름·겨울 날씨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엘니뇨가 나타난 해는 전반적으로 여름이 서늘하고 겨울은 따뜻했다. 35∼95년 엘니뇨가 있었던 여름철 열다섯 번 중 평년보다 기온이 높았던 해는 한 해뿐이었다(<그림 2> 참조). 이같은 통계는 엘니뇨가 발생할 때 동아시아에 ‘서늘한 여름, 따뜻한 겨울’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는 외국의 연구 결과들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통계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엘니뇨는 항상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단순한 통계보다는 엘니뇨가 한반도 기후에 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상연구소 권원태 박사(예보연구실)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이 역학 모델이다. 엘니뇨가 발생할 때는 해수면 온도뿐 아니라 대기의 순환 양태도 변화한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이들 간의 역학을 응용해 엘니뇨를 예측하는 모델이 세계적으로 20종 가량 개발되었는데, 대기-해양 접합 모델, 혼합 모델, 대기-해양 대순환 모델 등이 그것이다. 이중 대기-해양 접합 모델로 엘니뇨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강인식 교수 팀은 최근 새로운 가설을 주장했다. 한반도의 기후는 적도 부근의 해수면 온도가 아니라, 중위도(15∼20°)에 해당하는 아열대 지방의 해수면 온도에 영향을 받는다는 가설이 그것이다. 즉 적도 부근에 엘니뇨가 발생했을 때 한반도가 곧장 그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열이 중위도 해수면까지 전달될 즈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 예로 서울의 겨울철 기온은 크게 3년 주기와 5∼6년 주기로 높고 낮음이 반복된다. 이 중 엘니뇨와 비슷한 5∼6년 주기로 서울의 겨울철 기온과 엘니뇨 강도를 비교한 강교수는, 강한 엘니뇨가 발생하면 그로부터 1년∼1년 반이 지난 뒤 서울의 겨울철 기온도 평년과 큰 편차를 나타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최근에 나온 국내외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아시아의 여름철 몬순은 엘니뇨와 9개월 가량 시간 차를 두고 영향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곧 강한 여름 몬순이 나타나기 전 해 가을∼겨울에는 엘니뇨가 있고, 이듬해 봄∼초여름에는 라니냐가 발생한다는 것이 이제까지 이들 연구가 밝혀낸 성과이다.

앞서의 연구 결과들은 엘니뇨가 분명 한반도 기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엘니뇨가 지구 온난화와 맞물리면서 더 가공할 위력을 떨치고 있다는 가설 또한 등장했다.

이같은 가설이 나오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엘니뇨의 강도가 점점 더 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82∼83년 엘니뇨는 발생했을 때만 해도 기상학자들이 이를 ‘금세기 최대 규모’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난해 발생한 엘니뇨가 적도 부근 해수면 온도를 5℃ 이상 빈번하게 올려 놓으면서 ‘금세기 최대 규모’라는 수사는 97~98년 엘니뇨로 넘어왔다.

이와 관련해 트렌버스 박사는 79년 이후 발생한 엘니뇨가 이전에 나타났던 엘니뇨보다 해수면 온도를 훨씬 올려 놓고 있다고 분석했다(<미국기상학회보> 97년12월호). 그가 제시한 그래프를 보면 월평균 온도 편차가 +2℃를 넘는 엘니뇨는 모두 79년 이후 발생했다(<그림 3> 참조). 이것이 지구 온난화와 관련된다고 추측하는 학자들은, 엘니뇨가 지구 온난화 영향을 받아 변질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올해 초 김정우 교수는, 이산화탄소 양이 지금보다 두 배로 늘었을 때 기온과 강수량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의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한반도의 기온은 지금보다 2.3℃ 높아지고, 연평균 강수량은 증가하나 여름철 강수량은 감소한다는 예측이 나왔다. 이것이 과거 엘니뇨가 발생했던 시기의 기후 양상과 거의 일치한다고 지적한 김교수는, 지구 온난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엘니뇨 현상은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상 연구=국민 재산 보호

두려웠던 봄은 지나가고 있지만 기상청은 더 큰 공포로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태풍이 오는 계절인 만큼 만에 하나 대형 재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니뇨가 끝날 무렵 재해가 많이 발생했던 과거의 경험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문제는 ‘금세기 최대 규모의 엘니뇨’ 앞에서 요행을 바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지난해 10월 정부는 ‘엘니뇨 종합대책 실무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이는 기존 중앙재해대책본부 조직에 이름만 한겹 더 걸친 사후 대응 기구이다. 북한이 엘니뇨 때문에 극심한 가뭄과 식량난을 겪는 것을 보면서도 ‘한국만은 이번에도 비켜 가겠지’라는 식이다.

범정부 차원에서 기후 변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기후법’(가칭)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아직 국회에는 상정조차 되지 못한 상태이다. ‘기상 연구에 대한 지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재해를 방지할 최소한의 대비책은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강인식 교수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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