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반장에서 점술가로 변신한 박용문씨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7.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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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가, 그것도 살인과 강도 사건을 주로 수사하는 강력반장 출신이 점쟁이가 되었다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무병(巫病)이 직업을 가려가며 발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병리 현상을 다루는 까닭에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형사·의사·기자 같은 직업인은 아무래도 무병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경기도 부천시 부천남부경찰서 강력반장(경사)이었던 박용문씨(49)가 퇴직 후 부천시 송내동에 ‘보문사’를 연 것은 지난 3월이었다. ‘과연 강력반장 출신일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다가구 주택 3층에 있는 보문사를 찾았다. 박씨는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체구가 크고(90㎏) 손목이 굵어 과거 한가락하던 형사임을 짐작케 했다.

박씨는 점장이가 된 사연부터 이야기했다. “어찌 된 일인지 지난해부터 복수(腹水)가 차고 몸이 부었어요. 병원을 다녔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다 무병이란 것을 알고 금년 1월5일 눈이 내리던 소한 날, 증평에 있는 산보산에서 만신 전춘자씨를 신어머니로 모시고 작두를 탔지요.”

박씨의 할머니는 울산에서 꽤 유명한 무당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무도 업을 잇지 않았다. 그로 인해 백부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등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박씨는 할머니가 모시던 ‘장군신’이 떠돌다가 손자인 자기에게 정착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강신받던 날 신어머니께서 방울채와 부채를 들고 서보라고 하는데 갑자기 신명이 오르더니 ‘나는 대신의 장군이다’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요.”

울산 언양고 시절 그는 유도와 씨름을 했고, 80년 경찰에 들어가 경기도 가평경찰서에 배치되었다. 그는 꽤 근성 있는 형사였던 것 같다. 85년 1월 청평의 한 가정집에서 세 어린이가 목이 잘려 발견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날 밤 그는 현리에서 일어난 다른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붙잡았던 터라 밤 새워 놀다가 이 소식을 접했다.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동료와 함께 시체만 겨우 치운 방에서 누워 잠을 잤다. 때마침 현장에 들린 사진 기자가 이 모습을 찍었다.

엽기적인 살인 사건 현장에서 태평하게 낮잠 자는 두 형사의 모습은 치안본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범인을 잡지 못한 데다 두 형사로 인해 욕까지 먹게 된 가평경찰서는 이들을 인사 조처하겠다는 등 법석을 피웠다. 그 와중에 그는 집에 들러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청평 일대의 불량배인 이 아무개씨가 나타났다. 그 길로 이씨 집으로 달려가 벽에 걸린 덜 마른 바지를 발견했다. 이씨를 붙잡아 족치자 ‘세 아이를 죽일 때 피가 묻어 바지를 빨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대낮에 도둑질을 하려고 그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아이가 자고 있었다. 도둑질을 하는데 그 아이가 일어나 ‘아저씨 왜 우리 것 훔쳐가요’라고 해서 죽였다. 그리고 그 집을 나오는데 동네 아이 2명이 그 집으로 놀러가기에 따라 들어가 두 아이도 죽였다”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그는 조서까지 작성한 후 이씨를 파출소 뒷방에 가두고 때를 기다렸다. 범인이 잡히지 않자 경기도경에서 지원반이 나왔다. 치안본부는 범인을 검거한 경찰관을 1계급 특진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 직후 박형사는 이씨를 데리고 가평경찰서로 들어갔다. 전화위복, 이 일로 살벌하던 가평서에 웃음꽃이 피었다. 인사 조처 대상자이던 그는 경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영감과 신기(神氣)는 강력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95년 12월 부천시 중동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도 그의 신기로 해결한 경우이다. 살인범은 대낮에 절단기로 방범 창살을 뜯고 침입해 치정 관계인 여자를 살해했다. 초동 수사에서 범인은 박 아무개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형사들이 용의자 박씨의 연고지인 영월 등지에 잠복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점 보러 온 범인 자수시키고, 최형우 고문 와병 예견하기도

어느 날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다고 질책을 들은 그는 압수한 용의자의 수첩을 뒤적이다가 경기도 광주시의 한 전화번호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혹시 박 아무개를 아느냐’고 묻자, 상대방은 당황하면서 ‘못만난 지 수년 됐다’라며 끊었다. 그 즉시 그는 직원들을 데리고 광주로 달려갔다. 그 곳은 용의자 박씨의 고향 선배가 사는 아파트였다. 그는 경비원을 불러 ‘아랫집에서 물이 샌다는 신고가 왔다’라고 말하게 하고, 문을 열어주는 틈을 이용해 권총을 빼들고 뛰어들었다. 용의자 박씨는 그 집에 숨어 있었다. 살인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옷도 그의 가방에서 나왔다.

형사로서 박씨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95년 경찰청이 전국적으로 실시한 강력범 소탕작전에서 1등을 해 청와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94년에는 추석절 민생 침해 사건 검거 실적이 좋아 부천서장의 표창을 받았다. 94년 여름에는 KBS의 <사건 25시>에 출연해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2백여 회 강도와 강간 사건을 저지르고 2명을 살해한 윤 아무개와 문 아무개 검거 사건을 소개하기도 했다.

박씨는 무당이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안방을 개조한 법당에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약사보살을 모신 만큼 법사로 불러 달라고 했다. 보문사를 개업한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는데, 한눈에 이미 관재수가 든(이미 감옥에 들어간)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도망갈 수 없는 팔자니 자수하시오”라고 했다. 알고 보니 손님은 차량치기범으로 수배된 인물로, 어느 방향으로 도망가야 살 수 있는지 물으러 온 참이었다. 사정을 알게 된 박씨는 ‘빨리 변호사 비용을 마련해, 아무개 형사를 찾아가 자수하라’고 권유했다. 범인은 박씨의 권유에 따라 자수했다.

박씨에게 북한 김정일의 것임을 숨기고 김정일의 생년월일을 내밀고 운세 풀이를 부탁하자 “이 사람은 외곬 성격에 2중 인격자라 인덕이 없다. 심신의 피로도 매우 심각하다. 이런 성격은 살인자나 자살자 중에 많다. 이 사람은 3년 안에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해 감옥에 갇히거나 죽을 운명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최형우 신한국당 고문이 쓰러지기 전 이상한 예감이 들어 최고문은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최고문 사무실로 전화를 건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신한국당의 대권 주자 중 한 사람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강신을 받기로 한 바로 전날 밤 목을 매려다 부인에게 들켜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잠결에 신께서 목을 매라고 해서 따랐다. 신은 내 신심이 굳은지 떠보려 했던 것 같다.” 그가 무병을 앓고 경찰에서 나올 때 아이들은 “왜 권총을 차고 다니던 아빠가 무당이 돼야 하느냐”라며 울고불고 반대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신내림은 가족에게 충격이었다.

무병과 신내림을 거치며 그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영매자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내년 봄 부천시에서 도당제가 열릴 때 신나게 작두를 탈 테니까 와서 꼭 보라”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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