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 소비 통해 ‘낭비의 포로’에서 벗어나자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8.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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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전후의 소비자 의식 및 행태’ 여론조사/응답자 81.3% “생활비 축소했다”
IMF구제 금융 시대를 겪으면서 수많은 한국인이 삶의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소비 부문의 의식과 행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대량 실직과 소득 감소로 소비 심리가 극도로 위축되는가 하면, 사회 전반의 집단적 불안 심리까지 가세해 기존 소비 유형과 의식이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런 혼란에는 일부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그동안 언론은 주로 60∼70년대식 ‘자린고비’로 되돌아가는 생활을 미덕이라고 치켜세우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 결과 건전한 소비 심리마저 위축되어 내수 시장이 무너지는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시사저널>은 국민이 바뀐 세상에 적응할 적절한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한국소비자보호원과 공동으로 ‘IMF 전후의 소비자 의식 및 행태’를 조사했다. 그런 다음 주요 국민 생활 분야에서 합리적으로 선택할 지표를 마련했다. <편집자>

IMF 체제가 들어선 이후 국민이 느끼고 있는 불안은 △물가 상승 △소득 감소 △실직 △대출 금리 인상 △세금 부담 순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불안에 대응하고자 국민이 가장 바짝 허리띠를 졸라맨 부분은 생활비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10명 중 7명꼴로 IMF 체제를 졸업할 시기를 3년 이내라고 내다보고 있지만, 막상 자신의 가정 경제는 점점 더 나빠질 것이라는 대답이 40%에 이르러 낙관적 전망(11%)보다 거의 4배나 높았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소비자보호원(소보원·원장 허신행)이 <시사저널>과 공동으로 IMF 체제에서 한국인의 합리적 소비 생활 모델을 마련하기 위해 실시한 ‘IMF 전후의 소비자 의식 및 행태 비교’ 여론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다. 지난 2월5일부터 10일 동안 전국 성인 남녀 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여론조사는, 크게 △소비에 대한 인식 △혼례 △외식 △소비 행태 변화 등 네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조사는 IMF 체제 이후 극도로 혼란 상태에 빠진 소비 의식의 현주소를 처음으로 종합 진단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건전 소비를 위한 분야별 선택 지표를 마련한다는 의도도 담았다(62~63쪽 딸린 기사 참조).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특징은 그동안 끊이지 않았던 과소비·충동·경쟁·모방 소비 등 소비 부문의 거품이 IMF 체제가 들어선 뒤 급속히 빠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자발적인 의식 개혁의 산물이 아니라 외부의 강요에 따른 것이어서 고통과 혼란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닥친 IMF 체제로 인해 국민들은 식품·주거 등 필수 부문의 소비 지출에서 큰 타격을 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는 이전과 비교해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지출에 대해 응답자들이 각각 식료품비(51.4%) 자가용 유지비(44.8%) 교육비(31.5%) 주거관리비(30.2%)라고 응답한 데서 알 수 있다.
고물가보다 고금리에 더 민감

이런 현상은 소비자들이 IMF가 몰고온 고물가보다는 고금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물가 상승을 가장 큰(77.6%) 걱정거리로 꼽았는데 남성보다는 여성이, 30~40대보다는 20대와 50대 이상이, 월 백만원 미만 저소득층이 높은 불안감을 내보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특히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소비 생활 변화가 급격하고, 저소득층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극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70.5%가 가정 형편이 나빠졌다고 했는데, 가구 소득 백만원 미만 응답자 1백50명 가운데 1백12명이 ‘매우 나빠졌다’고 대답해 이들이 가계 고통을 매우 심하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향후 자기의 경제적 안정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계층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IMF 이전 조사 때 비관적 전망이 5.7%였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21.9%로 증가했다.

경제난에 따라 이전에 세운 계획을 취소하거나 늦춘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는 73.1%에 이르렀다. 항목 별로는 과외·학원 수강 등 사교육비가 27.7%, 자가용차 구입·바꾸기가 25.9%, 내집 마련 및 늘려서 이사하기가 24.5%를 차지했다. 특히 이런 경험은 성별·연령별·소득별 특성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는데, 남성은 자가용차 구입·바꾸기 취소 및 연기가, 여성은 진학·학원 수강 포기 또는 연기가 높게 나타났다. 연령 별로는 핵심 경제 활동 계층인 30, 40대 연령층의 계획(내 집 마련·자가용차 구입·사교육)취소 또는 연기 경험이 더 높았다. 소득 별로는 소득이 높을수록 해외 여행 취소 경험을 들었고, 월 백만∼3백만 원 소득 계층은 자가용차 구입을 포기한 경험이 더 많은 것으로 응답했다.

생활비 가운데 용돈 가장 많이 줄여

최근에 바뀐 소비 생활을 물은 항목에는 응답자의 81.3%가 생활비 축소를 꼽았고, 그 다음으로 대중 교통 이용(37.7%) 적금·보험 해약(23.7%) 가계부 쓰기(21.1%) 등을 들었다. 집 규모를 줄였다든지 자가용차를 처분했다고 응답한 경우는 각각 28명(2.9%) 26명(2.7%)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IMF 체제가 저소득층에게 더 큰 소비 생활 변화를 강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월 소득 백만원 미만 저소득층에서 대중 교통 이용, 생활비 줄이기, 적금·보험 해약 등으로 현재의 고통을 넘기고 있다고 대답한 경우가 많았다. 또 월 소득 2백만원 이상 중류층에서는 그동안 누려온 여가·문화 생활을 잠시 접어두는 대신, 최대한 생활비를 절약해 경제 위기를 넘기고자 하는 심리가 높은 것으로 풀이된다.

생활비 가운데서 많이 줄인 분야는 용돈(57.3%) 외식비(45.8%) 식료품비(38.5%) 의류비(37.1%)였다. 그밖에도 교육비(28.3%) 교양오락비(21.3%) 교제비(20.4%) 지출이 주요 절약 항목으로 꼽혔다.

생활비 절약 항목은 연령 별로도 그 행태가 뚜렷이 구분되었다. 20대는 용돈과 교제비를, 30대는 외식비를, 40대는 교육비를 각각 가장 많이 줄였다고 응답했다. 또 소득 별로는 백만원 미만은 식료품비와 용돈을, 백만∼3백만 원 소득 계층은 교육비를, 3백만원 이상 소득 계층은 의류비를 각각 가장 많이 줄였다고 응답했다.

이로 미루어 경제난 이후 우리 국민에게는 ‘될수록 안 먹고 안 쓰고 잠시 엎드린다’는 심리가 팽배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모든 계층이 생활비 지출 억제에 1차적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동안 지적되어온 헤픈 씀씀이, 즉 소비의 거품 현상이 급속히 진정되는 현상이 단시일 내에 나타난 것이다.
“소득 줄었지만 나는 중산층” 76%

한편 경제난 이후 의식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한 소비 절약 습관을 묻는 항목에는, 자가용차 이용 줄이기가 48.4%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 부문은 특히 월소득 2백만∼3백만 원인 30, 40대 연령층이 가장 많이 실천하는 항목으로 꼽았다. 그 뒤를 이어 겨울철 실내 온도 낮추기(46.2%) 외식 횟수 줄이기(43.9%) 술자리 줄이기(40.5%) 경조사비 줄이기(37.2%) 자녀 사교육비 줄이기(35.9%) 전등 하나 끄기(35.4%)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응답자의 70.5%가 IMF 사태로 인해 가정 형편이 나빠졌다고 대답하면서도, 자기의 계층 귀속 의식은 이전에 비해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응답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여름 소보원이 조사한 ‘97년 한국의 소비 생활 지표’에 따르면, 국민 73%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도 이보다 조금 더 많은 76%가 중류층 귀속 의식을 보였다. 소득 감소와 소비 생활 위축과는 상관없이 국민 각자가 느끼는 계층 의식은 아직 종전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상은 경제 위기로 인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국민 의식 저변에 ‘이 고통이 일시적이며 반드시 극복될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이 IMF 체제를 극복할 시기에 대한 전망에서도 드러난다. 1년 이내가 될 것이라는 응답이 3.3%, 1∼2년이 33.8%, 2∼3년이 37.6%로 각각 나타나 10명 중 7명 이상이 비교적 짧은 기간인 3년 이내에 한국이 IMF 체제를 졸업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IMF 체제는 국민의 구체적 소비 지출 행태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소비를 대하는 의식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최근까지 소비 생활 측면에서 경쟁적 모방 소비 의식이나 차별화 소비 행위를 하려는 경향이 한국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과도한 경쟁적 소비로 인해 많은 국민이 좌절감을 겪었다. 지난해 6월 소보원이 실태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67%가 남보다 좀더 나은 차별화 소비 행위를 추구하고 있다고 답변했으며, 64.3%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빚을 내서라도 경쟁적인 소비 행위를 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응답자의 60.3%는 이런 소비 생활 풍조가 때로는 좌절감을 안겨준다고 대답했다.

이는 그동안 한국 국민이 물질주의·개인주의 사고 확산에 영향을 받아, 개인의 지위나 품위를 소비를 통해서 내보이고자 하는 ‘소비의 경제·사회적 상징성’에 포로가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이같은 소비 의식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웃의 소비 생활 바람직하게 변화” 86.9%

고도 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국민 의식에 널리 자리잡았던 체면과 경쟁적 소비 심리는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대신 합리성과 건전성을 기준으로 하는 소비 행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IMF 사태 이전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내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응답한 국민이 82%에 이르렀으나 이번 조사에서 75%로 감소했다. 또 ‘가전 제품을 구입할 때는 무조건 대형을 골라야 한다’고 대답했던 응답자가 60%에서 33%로 줄었다.

건강에 대한 의식은 별 차이가 없었으나 가족 동반 주말 휴식에 대해서는 63.2%가 부정적 인식을 보였다. 그밖에 충동 구매, 유명 상표 선호 의식, 편승 구매 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이전의 조사에 비해 각각 6%, 3%, 1% 포인트씩 높아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조사 결과는 IMF 체제가 국민에게 고통과 혼란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급속한 의식 개혁을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소비를 통해 개인의 부를 무절제하게 과시하려는 행위나, 크고 좋은 집·값비싼 옷·고급 승용차 소비를 통해 자기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행위가 바르지 않다는 점을 서서히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의 소비 의식이 전반적으로 건전하게 변했다는 사실은 ‘경제난 이후 이웃의 소비 생활 태도’에 대한 답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전에는 응답자 가운데 60%가 이웃이 과소비를 일삼는다고 생각한 반면, 이번에는 86.9%가 이웃의 소비 생활이 바람직하게 변화했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이같은 국민 의식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들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한 해 국내총생산(GDP)의 63%를 차지한 민간 소비는 경제난 이후 거의 붕괴 단계에 이르렀다. 극심한 소비 위축으로 내수용 소비재를 생산하는 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몰려 울상짓고 있다. 기업들은 이런 현상이 지나친 절약운동 탓이라고 화살을 돌린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비자들의 합리적 의식 변화를 기업이 따르지 못하는 데서 더 큰 원인이 발견된다. 그동안 거품 소비를 겨냥해 사세를 확장하고 대형 소비재를 생산해 온 기업으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소비 건전화로 인해 집중 타격을 받는 분야가 주로 중·대형 차(공장 가동률 20%), 대형 가전제품(공장 가동률 60%), 대형 의류 업체(매출액 30% 감소)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따라서 내수를 기반으로 하는 기업체들은 시급히 국민의 바뀐 소비 의식과 행태에 부응하는 생산 체제로 전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이 스스로 소비자의 변화에 따라 값 싸고 질 좋은 물건을 만드는 길만이, 소비자도 살고 기업도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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