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에 도전하는 수펙스 정신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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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 기업을 목표로 삼고 따라가면 그 일류 기업은 그동안 더 앞으로 내닫기 때문에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 이같은 깨달음이 선경그룹으로 하여금 수펙스(SUPEX)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선경은 참 운이 좋은 기업이다. 6공 말 선경은 식별 번호 017인 제2 이동 전화 사업자로 선정되었으나, 최종현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이라는 이유로 구설에 오르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그후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은 포항제철과 코오롱이 연합한 신세기통신에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 신세기통신은 신규 가입 정체로 상당한 경영 압박을 받고 있다.

94년 정부가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계획을 밝히자, 많은 사람들이 ‘동정 차원에서’ 선경에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7월 선경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고 이후 SK텔레콤으로 개명했다(선경그룹은 내년 1월5일 모든 계열사와 그룹 이름을 SK로 바꾼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현재 이동 전화 011과 무선 호출(삐삐) 012를 함께 운용하는 SK텔레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011은 4백49만명, 012는 7백42만명으로 가입자가 불어났다. 백만명이 가입한 신세기통신과 최근 50만명으로 발표된 3개 PCS를 압도적으로 앞선 것이다.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통화료는 한국통신이 받아서 SK텔레콤에 전한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의 한 사장은 “체납 없이 한국통신이 착착 현금을 보내 주니, 얼마나 사업하기 좋겠는가. SK텔레콤과 선경그룹은 상당 기간 순항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이런 전망을 뒷받침하듯 SK텔레콤은 유선 방송(CATV) 무선 송출과 ‘넷츠 고’라는 PC통신 사업권을 획득하고, 이동 통신과 멀티 미디어가 결합된 IMT2000 사업에 진출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금탁(金託) 통치’가 시작된 지금 5대 그룹 중 선경의 재무 구조가 가장 견실하다고 한다. 017에서 011로 바뀐 전화 위복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선경이 가능했을까?

80년 선경이 유공(사장 조규향)을 인수한 것은 ‘원조(元祖) 행운’에 해당한다. 삼성그룹과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유공을 인수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며 시비가 일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앞에는 최근 SK(주)로 회사 이름을 바꾼 유공 사옥이 있다. 유공이 이 건물에 입주한 것은 83년이었으나, 상당 기간 회사 간판을 붙이지 않았다. 의사당으로 가던 국회의원들이 유공 간판을 보고 ‘열을 받아’ 다시 특혜 시비를 일으킬까 염려해서였다.

유공 인수에 대해 선경측은 철저히 준비했다가 기회가 왔을 때 도약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 탄탄한 준비는 73년 최종현씨가 그룹 회장에 취임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선경그룹의 모체는, 지금은 SKI로 통합된 옷감 회사 선경직물이다. 선경직물 사장 시절 최종현씨는 당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원사(原絲) 공장 건설을 성사시킨 바 있다. 주유소 운영업자가 일거에 정유공장을 짓는 식의 기적을 이루어냄으로써, 새우가 고래를 삼킬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장형 최종건씨가 갑자기 사망해 최종현씨가 그룹 회장에 취임한 73년은 1차 오일 쇼크가 몰아친 때였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려는 최회장의 패기는 이때 본격적으로 발동했다. 옷감은 석유를 원료로 한 산업의 최종 제품이다. 원유를 정유하면 휘발유 등과 함께 납사가 나온다. 납사를 석유화학 공장에서 처리하면 벤젠 등 합성섬유 원료가 나오고, 이를 섬유공장에서 가공하면 원사가 된다. 원사로 옷감을 만드는 것이 직물공장이다.

75년 그룹 신년사에서 최회장은 석유→정유→석유화학→합섬→직물로 이어지는 수직 계열화를 완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섬유 회사 단계로 겨우 올라온 선경이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를 이루겠다고 한 것은, 고래를 삼켜 보겠다는 새우의 야심찬 다짐이었다.

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이 방위산업을 적극 육성하자, 대기업들은 앞을 다투어 중화학공업에 진출했다. 그러나 최회장만은 한눈을 팔지 않았다. 당시 한국 경제는 매우 활력이 넘쳤으나 경영의 소프트 웨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전년 대비 20% 성장이 경영의 목표이고, 경리와 노무 관리가 경영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과 시카고 대학원을 나온 최회장은 달랐다. ‘다른 그룹처럼 정강이를 걷어차며 밀어붙이면 당장은 빠른 듯해도 결국 늦어진다. 바쁠수록 돌아간다’라며 그는 합리적 방안을 모색했다.
유학 시절 최회장은 아침마다 갈등하는 화장실을 목격했다. 기숙사 화장실은 상·하급생간, 아침 수업에 바쁜 사람끼리의 순서 쟁탈전으로 소란했다. 기숙사나 군대에서 화장실을 뜻하는 속어가 캔(can)이다. 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과 병사 들은 ‘계급장을 완전히 떼놓고’ 미팅을 가졌다. 그들은 갈등 요소를 모두 꺼내 격론을 거듭하다 서로를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행동 계획이 나올 때까지 캔 미팅을 계속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를 이루기 위해 최회장은 캔 미팅을 도입했다. 기획·인사·구매·생산 등 모든 분야 책임자를 한 방에 가두어 놓고 행동 계획을 마련할 때까지 토론을 거듭하게 했다. 여기서 사람들은, 경영은 곧 사람 간의 대화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선경은 캔 미팅을 4년여 지속하며 인사 고과 제도 등 다양한 경영 기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79년 최회장은 직원들이 이러한 제도에 익숙해졌다고 판단하고 캔 미팅에서 결정한 경영 기법을 선경경영시스템(SKMS:Sunkyong Management System)으로 선포했다.

80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유공의 합작선인 걸프사가 철수를 결정하고 정부에 지분을 매각한 것이다. 78년 2차 오일 쇼크에 이어 80년에도 한국은 원유가 부족해 고통을 겪고 있었다(80년 ‘서울의 봄’ 시위가 격화하기 직전,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으로 날아가 원유 공급을 사정할 만큼 다급했다). 유학생 시절 최회장은 중동의 왕자들과 사귈 기회가 많았다. 이때 형성한 인맥 덕분에 선경은 원유 확보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정부는 이런 능력에 주목해 걸프 지분을 선경에 매각했다.

유공을 인수하자 선경은 단번에 5대 재벌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주인 없는 회사 유공에 ‘점령군’이 진주했으니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갈등은 푸는 데 최회장은 캔 미팅을 활용하며 서서히 SKMS를 접목했다.

최회장은 89년 SKMS를 무려 10년간 활용했음에도 선경이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류 기업을 목표로 삼고 따라가면, 그 일류 기업은 더 앞으로 내달으므로 영원히 세계 일류가 될 수 없다.’ 이렇게 판단한 최회장은 세계 일류를 뛰어넘는 극한 수준을 목표로 결정했다. 극한 목표란 가령 100m를 9.8초에 주파한다든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른다든지 하는 식으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최고치를 말한다. 9.8초를 목표로 연습하다 보면 9.9초에 달리는 세계 일류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 최회장의 판단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그는 수펙스(SUPEX:Super Excellent Level)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기업은 개인이 아닌 조직이다. 그는 수펙스 추구 방법 또한 조직적이라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일처리 4단계를 발표했다. 목표를 수펙스 수준으로 아주 높게 잡는 것이 제1 단계이다. 2단계는 빈틈 없고 야무지게 일할 수 있도록 목표 달성에 필요한 핵심 요소와 장애 요소를 미리 파악하는 것이다. 3단계는 마케팅(M)과 생산(P), 연구개발(R:R&D), 각종 지원 업무(S) 그리고 최고 경영자(T)가 함께 굴러가는 ‘MPR-S-T 풀 코트 프레싱’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4단계는 이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수시로 캔 미팅을 갖는 것이다.

SKMS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80년대 초 최회장은 미국에서 확장 일로이던 이동 전화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목정래 미주본부장으로 하여금 이동 전화 사업을 집중 연구케 했다. 10년간 연구 과정을 거쳐 94년 선경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을 때의 일이다. 공기업에서 민간 기업으로 바뀌자 불안해진 노조원들이 6개월간 시위를 계속했다. 노조원들은 ‘점령군 사령관’인 손길승 부회장(그룹 경영기획실장 겸임) 출근 저지 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손부회장은 사원들을 소줏집으로 불러 손길승식 캔 미팅을 가졌다. 그는 “수펙스란 업무 강도를 높이기 위한 목표치가 아니라, 경영을 더 잘하기 위한 도구다”라고 설득했다. 동시에 전국 각지의 지사·지점을 찾아다니며 SKMS와 수펙스를 강의했다.
손길승식 캔 미팅이 2년간 지속되는 동안 저항은 이해로, 이해는 비자발적 참여로, 비자발적 참여는 자발적 참여로 바뀌어 갔다. 95년 3월 전전자 교환기(TDX) 개발 신화를 이룩한 서정욱 박사가 SK텔레콤 사장에 취임했다. 서사장은 선경 출신은 아니지만, 평생을 수펙스를 추구하는 식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서사장은 ‘세계 최초로 코드 분할 다중 접속 방식(CDMA)을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돌진해, 96년 말 성공했다. 바로 여기서 선경은 ‘운이 좋은 기업’이라는 세평을 거부한다. 017을 인수했더라도 흑자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이 선경의 자신감이다.

LG의 자율 경영과 ‘도약 2005’는 미국 매킨지사의 컨설팅을 받은 덕분이다. 때문에 독자적으로 경영 시스템을 만든 그룹은 선경과 삼성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은 매우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지만 시스템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스타일리스트적 특징이 있어 효율보다는 모양에 신경을 많이 쓴다. 따라서 새로운 시스템에 늦게 적응하는 조직원일수록 쉬 떨어져 나가 ‘비정한 삼성’이라는 불명예를 얻고 있다.

“우리의 경영 기법, 후세에 남겨 주자”

그러나 선경은 SKMS를 10년간 적용한 다음에야 수펙스를 추구했으리만큼 진중하다. ‘곰바우’ 같은 이 진중함은 ‘산업 시설 같은 하드 웨어뿐만 아니라, 경영 기법 같은 소프트 웨어도 후세에 남겨 주자’는 최회장의 소신에서 나왔다. 최회장은 수펙스에서 성공을 이룬 사람은 반드시 포상하고, 이를 사례집으로 만들어 각사에 회람시키는 ‘수펙스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다.

선경이라고 해서 ‘칼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95년 SKI는 무려 9백여 명을 명예 퇴직시켰다. 그러나 진중한 기업 문화 덕분에 명퇴자 대부분이 섭섭함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SK(주) 또한 파이프 사업·합성고무 사업·팡이제로 생산 등 한계 사업은 과감히 정리한다. 이러한 칼 바람은 ‘본업 회귀, 기본에 충실하자’는 선경의 모토와 닿아 있다. 핵심 역량이 있거나, 다른 기업에 비해 차별적 우위가 있는 분야에서만 승부를 건다는 것이 선경의 전략이다.

외환이 부족해 애가 타던 지난 11월26일 국내 도급 순위 12위인 선경건설(사장 정순착)이 멕시코의 석유화학단지 공사를 25억 달러에 수주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이로써 선경건설의 해외 공사 수주고는 현대건설·동아건설에 이어 3위에 올라섰다. SK맨의 수펙스 추구 정신이 불황 한파를 거뜬히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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