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하게 살아가는 평균 한국인'의 힘
  • 宋 俊·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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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선정 4인의 어제와 오늘/성실·근면이 IMF 돌파 밑천…취미는 ‘돈 안드는 등산
문득 거울이 무심히 지나친 세월의 자취를 보여줄 때가 있다. 그 속에는 ‘또 하나의 나’가 있다. 거울 속의 나는 가파른 일상의 속도에 휘말리느라 잊고 있던 본래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거울에 비친 자화상은, 내면을 성찰해 번잡해진 자아를 추스르고 흐트러진 생활의 매무새를 가다듬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기실 조금만 신경 써서 살펴보면, 거울은 어디에나 있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너(우리)’의 모습은 곧 각박한 현대 생활에 찌든 한국인의 초상이나 다름없다.

89년 창간한 이후 <시사저널>은 우리의 자화상을 성찰해 보자는 계기로 ‘평균 한국인’을 선정해 왔다. 생활 수준·학력·나이·키·몸무게 따위를 기준으로 삼아 컴퓨터 조사를 한 결과, 백종화(89년) 심영호(91년) 정천규·최영수 (96년) 씨가 뽑혔다.

사실 평균 한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선정된 개념상의 존재일 뿐이다. 요는 ‘누가 평균 한국인인가’가 아니라 ‘평균의 삶은 어떠한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였다. 양 극단을 포함해 전체의 무게 중심을 짚어 본다는 차원에서 <시사저널>은 ‘평균’이라는 지표를 주목했다. 평균 한국인은 당대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불황 이겨낸 정천규의 ‘단추 철학’

그렇다면 초유의 경제 난국에 맞닥뜨린 한국인의 초상은 어떤 모습일까. ‘IMF 시대의 평균’은 어느 수준에 자리매김될까. <시사저널>은 수많은 논의 끝에 ‘새 평균’을 선정하기보다 ‘기왕의 평균’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헤쳐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연쇄 부도와 실업으로 얼룩진 파행적 과도기의 평균은 흥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초점은 한국의 평균들이 IMF 난국을 이겨내고 있을까, 아니면 세태에 휘말렸을까로 모아졌다. 둘은 중소기업가, 둘은 직장인. 양쪽 다 IMF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놓인 처지였던 것이다.

네 사람의 근황을 확인해 보니 ‘평균의 힘’은 살아 있었다. 묵묵히, 당당히. 순리대로 세파의 결을 좇으며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황소 걸음들이었다. 네 사람은 공교롭게도 평범의 위대함을 웅변하는, 결코 우연으로만은 볼 수 없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거품에 현혹되지 않고 분수를 지키는 절제의 미덕이 그 하나였고, 스스로를 지키는 생활 철학에 충실했다는 점이 다른 하나였다.

경제 활동 측면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은 정천규씨(36)다. 96년 3월 정씨는 서울 장위동 주택가에 2층 양옥을 전세(7천만원) 얻어 2층은 살림집, 1층은 사무실로 쓰며 현대상사라는 단추 오퍼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출퇴근에 시간 빼앗기지 않고 밤 늦게까지 편하게 일하기 위해’ 떠올린 구상이었다.
98년 10월 정씨는 여전히 같은 집을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소유주는 이제 정씨 자신이다. 살림집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아담한 정원이 딸린 2층 양옥을 따로 장만했다. 사업 규모도 커졌다(이름도 ‘현대인터코’로 바뀌었다). 단추에 이어 지퍼까지 취급하는데, 의정부와 중국 톈진(天津)에 공장을 두고 직접 임가공해 수출까지 겸한다. 미국·프랑스·스웨덴·일본·중국이 거래선이다. 취급 품목은 모두 80여 종. 지금은 이 가운데 3종만을 직접 생산하는데, 곧 단추 전문 디자이너를 두고 고급품 위주로 전환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신용과 성실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굳게 믿는 정씨는 이를 ‘단추 철학’으로 풀어 말한다. “흔히들 작은 단추라고 우습게 알지만, 단추가 제 자리를 잡아야 비로소 옷이 완성된다. 불량 단추로 인해 의류 수출 계약이 무산될 수도 있다. 적어도 단추로 인한 차질은 주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단추·지퍼 제조 수준에서 한국은 일본에 이어 2위를 지키고 있는데, 가격 경쟁력은 월등히 높다. 다른 나라는 기술에서 따라오지 못한다. 이 미묘한 비교 우위를 간파한 정씨는, 남들이 내수 시장에 만족할 때 조심스럽게 해외 진출을 준비했다. 올해 초의 환율 파동은 오히려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단추 시장의 속성 또한 정씨와 궁합이 맞았다. 옷이 사라지지 않는 한 단추의 장래는 유구하다. 그렇지만 워낙 싼 품목이어서 일확 천금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게다가 불량품 검사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손이 여간 많이 가는 품목이 아니다. 정씨는 이 점이 좋았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모든 게 따라온다. 갑작스런 성공은 생활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꾸준한 것이 마음 편하다.”

그렇다고 꾸준한 길이 늘 평탄한 것은 아니다. 정씨는 역경을 이겨낸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다.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에서 태어난 그는 충남기계공고(대전) 3학년 2학기 때 서울로 현장 실습을 왔다가 남대문 시장에서 ‘돼지 잡는 칼잡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도살해서 내장을 빼낸 돼지를 부위 별로 잘라 시내 정육점에 배달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84년 고향 선배의 소개로 단추 오퍼상에 취직했고, 이후 햇수로 15년 동안 한 우물을 팠다.

90∼92년이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동안 신용을 쌓아 온 거래처 사람들을 밑천 삼아 독립한 것이 89년. 악전고투 끝에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었다. 90년대 들어 싼값으로 전세계를 뒤흔든 중국의 ‘섬유 강풍’은 국내 의류 업체들의 줄도산을 불렀고, 그 파장은 정씨의 사업을 뿌리째 흔들었다. 부도를 내 피해를 최소화할 수도 있었지만, 정씨는 신용의 힘을 믿었다.

빚을 갚으려고 어렵사리 장만한 집을 팔고 없는 돈까지 끌어다 대면서 2년여 사글세방을 전전했다. 이 때 거래한 파트너들이 훗날 재기의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지금껏 정씨는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키우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라고 믿고 있다. 인연은 새 인연을 낳고, 신용은 그렇게 증식된다는 믿음이다.

아내 최길남씨(34)도 그 시절에 만났다. 드라이브가 유일한 취미였던 정씨는 고통을 함께해 준 여인과 밤새 고속도로나 국도를 달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93년 결혼했다. 지금도 정씨의 취미는 드라이브다. 다만 탑승자 명단에 딸 주희(6)와 아들 주원(5)이를 더했을 뿐이다.
심영호 부부의 부창부수 짠돌이 전략

심영호씨(45)는 IMF 여파를 실감 나게 겪고 있다. 그가 경영하는 신라침구(서울 원남동)의 매출액이 절반으로 뚝 떨어진 것이다. 한창 좋을 때는 원단을 사들여 제품 만들기에 바빴는데,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원자재 재고가 골치 아플 지경이다. ‘남편은 생산 아내는 판매’(부인 정지영씨(42)가 서울 광장시장에서 침구상 신라침구를 운영)라는 환상적인 부부 분업 체제가 불황의 타격을 덜어 준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호황기에 덩달아 사업을 크게 벌였더라면 위기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떠서 부화 뇌동하는 것이 딱 질색인 심씨는 내실을 택했다. 특히 남의 돈 쓰기가 마뜩치 않아, 딱 한번 은행 돈을 빌린 적이 있을 뿐 빚이나 외상 거래는 사절이다. 어음·가계 수표도 거래하지 않는다. 이같은 ‘돌다리 경영’으로 심씨는 혹독한 불황을 견디고 있다.

심씨 부부는 짠돌이·짠순이임을 자처한다. IMF 사태 이전부터 그랬다. 10년 전쯤 친구 가족을 초청한 적이 있는데, 친구 아들이 “아빠, 이것도 집이야?”라고 물어본 일화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집이 워낙 허름한데다 도둑맞을 것도 없어 심씨는 아예 대문을 열어두고 살았다. 그렇게 20여 년 살아온 집을 지난해 여름에 팔았다. 수십 차례 ‘낙방’한 끝에 44평 아파트에 당첨된 덕분이다. 그렇지만 새 아파트가 심씨에게는 두고두고 회한으로 느껴질 판이다. 부모님 모시자고 넓은 평수를 고집했는데, 당첨될 무렵에 그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IMF 이후로 심씨는 더 짠돌이가 되었다. 생활비·용돈 긴축은 기본. 볼링·수영 같은 취미도 등산으로 바꾸었다. 초·중·고등학교 동창 모임도 경비 절감을 위해 아예 산에서 만나는 쪽으로 전환했다. 아이들의 성화를 무릅쓰고 주말의 영화·연극 관람도 일절 끊어 버리고 매월 하던 1박2일 기차 여행도 올 4월을 끝으로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심씨를 자린고비로 보면 곤란하다. 심씨네 가훈은 ‘여덕위린(與德爲隣)’, 덕을 베풀면 이웃이 많다는 뜻이다. 받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기쁘다는 심씨는 경북 김천의 두메에 사는 소녀 가장에게 매달 성금을 보내기도 했고, 군·경 친구들에게 라면이나 과일 상자를 사들고 찾아가 부하들과 회식이나 하라며 놓고 오기도 했다. 직원과 함께 하는 회식도 주저하지 않는다. 가끔은 디스코테크에도 함께 간다. 재산은 사회의 향기가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심씨의 지론이다.

심씨는 명예를 삶의 가장 큰 덕목으로 꼽는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떳떳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것이 곧 명예’라고 말하는 그는, 상류층 인사들의 부패와 방종이 못마땅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즈(상류층의 도덕적 의무)’가 실종된 것이 사회를 더욱 혼탁하게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긴축으로 IMF를 이겨내는 양상은 서울우유협동조합 분당 지점에 근무하는 최영수씨(37)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단 외식·주말 놀이를 중단했고, 새 옷도 당분간 논외다. 회식도 1차로 끝, 2·3차는 옛말이다. 동창 모임도 대폭 간소화했다. 대신 집에서 마시는 술이 늘었다. ‘일찍 귀가해서 좋기는 한데 혼자서 소주 1∼2병을 비우는 모습은 어쩐지 안쓰럽다’는 것이 부인 박은자씨(36)의 소감이다.

96년 차점 평균 한국인 최씨는, 스키·사냥·스킨스쿠버·테니스·수영 등 평범하지 않은 ‘화려한’ 취미 생활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짜임새 있게 생활하고 부지런만 떨면 얼마든지 다양한 레저 활동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였다. IMF 이후 최씨는 등산으로 취미를 통일했다. 여럿이 혹은 혼자서 주말마다 산을 찾는다. 건강에도 그만일 뿐더러 이런저런 생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기에 등산만한 것이 없단다.

축소 일변도인 생활에서도 최씨의 얼굴이 넉넉하게 느껴지는 것은, 96년 말 구리시에 33평 아파트를 장만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최씨의 내집 마련 과정은 한국인 서민의 전형적인 평균치에 해당한다. 6년 연애해 88년 결혼한 최씨 내외의 연례 행사는 다름 아닌 이사였다. 소득 대부분이 전세금 인상에 쓰였고, 나중에는 아파트 중도금으로 나갔다. 마지막 남은 장기 융자(20년)를 갚느라 지금도 매달 60만원이 들어간다. 아침 4∼6시 신문을 돌리며 아내까지 가세한 최씨네의 ‘IMF 돌파 작전’은 가족의 화목으로 귀결된다.

만년 과장 최영수 “가장 큰 덕목은 인화·화목”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최씨는 인화를 최우선 덕목으로 꼽는다. 입사 14년째 과장으로 머무르면서도 최씨가 서울우유에 애정을 갖는 까닭이 바로 인화이다. IMF 위기도 회사 주인인 6천여 낙농가와 1천8백여 직원이 기꺼이 서로 양보함으로써 흉한 꼴 없이 넘겼다. 직원들이 월급과 상여금 일부를 삭감한 만큼 목장주들은 원유 대금 일부를 반납한 것이다. 회사 규모가 일정하다 보니 상급자가 퇴직하지 않는 한 승진은 언감 생심. 그래도 최씨는 정년 때까지 정든 동료와 함께 일한다는 점이 더 소중하다며 만년 과장의 처지를 흐뭇해 한다. ‘1호 평균 한국인’ 백종화씨(47)는 국민은행 장안동 지점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지난 1월 명예 퇴직을 선택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조용히 새 인생을 구상하고 싶다며 정중히 인터뷰를 거절한 백씨는 “이제는 평균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정치 불신과 무관심이다. 이는 정치권의 해묵은 추태와 무능력이 국민 평균으로부터 얼마나 소외되고 있는지, 거꾸로 권력자들이 국민의 눈을 얼마나 도외시하고 있는지를 시사하는 바로미터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너무 자주, 건강한 ‘평균’들이 한국인의 초상을 비추는 거울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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