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잊게 할 추천 만화 28편
  • 오윤현 기자(noma@e-sisa.co.kr) ()
  • 승인 2000.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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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추천한 ‘여름 피서용’ 28편/영화·소설 못지 않은 명작 많아
‘만화의 바다’에 풍덩 빠져 보자. 자동차를 몰고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피서도 괜찮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만화 삼매경에 드는 것 또한 남부럽지 않은 피서이다.

재충전은 우선 비우기에서 시작한다. 비우기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느림의 미학’에서 가능하다. 유명 피서지는 또 다른 대도시일 따름이다. 일과 휴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도시인들로 바글거린다. 올 여름에는 사람들이 떠난 텅 빈 도시에서 만화에 몰입해 보자. 만화는 일에 쫓겨 굳을 대로 굳은 뇌세포를 부드럽게 마사지해 줄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는 명제는 언제나 진실이다. 만화의 바다로 첨벙 뛰어들어 말라비틀어진 상상력을 촉촉히 적셔 보자. 생각의 유연성을 되살리지 못하는 휴식은 휴식이 아니다.

만화책은 아주 조용한 휴가지이다. 아직도 질 낮은 만화가 수두룩하지만, 눈여겨 살펴보면 영화나 문학 작품 못지 않은 명작이 곳곳에 숨어 있다. 한 만화학자는 ‘만화는 답답한 도시 생활에 숨통을 틔워 주는 공원’이라고 말했다. 만화는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자연 녹지이다. 만화는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타임머신이고,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고 가는 판타지이다.

<시사저널>은 만화가·만화 비평가·만화 편집자·만화 마니아 들의 추천을 받아 감동과 흥미, 환상과 스릴이 넘치는 국내외 명작 만화 스물여덟 편을 추천받았다. 여기에 소개된 만화들은 서점이나 대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만화의 공원으로 가 몸과 마음을 산책해 보자.
역사·시대 만화:당당한 ‘영웅’들을 만난다

대부분의 역사·시대 만화는 갈등 구조에 빈틈이 없다. 선악을 나누는 기준도 엄격하다. 시나리오와 구도는 영화 뺨칠 만큼 완성도가 높다. <임꺽정>(이두호)은 역사 만화의 그같은 점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만화가 이두호는 홍명희의 풍요하기 그지없는 원작을 거의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았다. 가진 것 없어도 있는 자 앞에서 쩔쩔매지 않고, 없는 자 앞에서 우쭐거리지 않는 인간상이 잘 나타나 있다. 잡초처럼 밟히면서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민초들의 삶을 통해, 힘들어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고우영씨의 1970년대 <임꺽정>과 방학기씨의 1980년대 <임꺽정>을 비교해 가며 보면 사나흘 일이 즐겁다.

<쥐>(아트 슈피겔만)는 역사 만화이면서 <임꺽정>과 여러 모로 다르다. 우선 실화인 데다, 무대가 히틀러 치하 유럽이다. 그림도 답답할 정도로 어둡다. 하지만 억눌린 소수(노동자와 유태인)가 암울한 현실에서 탈피하고자 몸부림치는 점은 비슷하다. <쥐>는 나치주의자를 고양이로, 유태인을 쥐로 설정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다. 무수한 죽음의 위협과 탈출·공포·배신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992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만화가 박흥용의 작품은 독특하다. 그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일을 대단하게 꾸미는 기술이 있다. 서얼 출신 주인공이 장님 검술가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칼 뒤에 숨어 자유롭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박흥용)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사무라이 만화나 이두호·고우영 씨의 역사 만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구르믈…>은 지금도 세상이 구름(불평등)에 휩싸여 있다고 말한다.

<묵공>(墨攻·모리 히데키)을 추천한 오세영씨(만화가)는 “스토리·연출·그림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묵공>은 그만큼 독특하고 뛰어나다. 중국의 전국시대, 휘몰아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묵자(B.C.480∼390년 께)의 뜻을 이어 받은 묵가인들은 반전 이론을 편다. 전쟁은 살인 행위이므로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불의라고 주장하며, 공격 받는 쪽을 도와 승리를 이끄는 것이다. 묵가인들의 지략이 인상적이다.

현강석씨의 글을 김정수씨가 그린 <불문율>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공간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누빈 젊은 협객들의 울분과 혈기를 다루었다. 김두한·시라소니 같은 인물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석한 이 작품은 가슴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헬무트>(권규정)는 교회의 권위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중세에 진보를 생각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장길산>(백성민)은 그림과 연출이 다른 역사 만화에 비해 사뭇 인상적이다. 고증과 전체적인 완성도가 뛰어나다. <장길산>은 단순한 도적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사랑·의리·배신·절망·열망 등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점을 커다란 스케일에 담고 있다.

극화:삶의 이면을 보는 전복적 상상력

드라마 요소를 띤 만화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 없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간판 스타>(이희재)도 마찬가지이다. 1970년대 고도 성장의 그늘에 가린 농촌에서 살던 한 소녀가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술집 작부가 되어 일한다. 여기까지 보면 뻔한 결론이 나올 것 같지만 천만에, 전혀 다른 슬픔을 전한다. 그 외 <간판 스타>에는 단편 여섯 편이 더 실려 있는데, 이 작품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숨어 있는 의식과 감추어진 양심을 슬며시 들추어 보게 만든다.

복제 미술과 세계 걸작에 얽힌 비화를 만나고 싶다면 <갤러리 페이크>(복제 화랑·호지노 후지코)를 넘겨볼 일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미술에 관한 비화들을 친절히 소개한다. 탄탄한 구성과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 잠시도 눈을 못 떼게 한다.
<마스터 키튼>(우라사와 나오키)은 지적 욕구에 목말라 하는 독자를 기쁘게 해줄 만한 작품이다. 고고학자이며 보험조사원인 주인공이 세계를 여행하며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역사·문화·사회 지식들이 풍부하게 나열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명가의 술>(오제 아키라)을 정독해 보자. 일본 최고의 술을 만들려는 한 젊은 여성이 일본 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시마 과장>으로 유명한 히로가네 겐시의 <정치 9단>은 젊은 초선 의원을 통해 일본 정치를 정공법으로 다루었다. 섬세하고 치밀한 스토리 라인 덕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자비하게 사람을 살해한 뒤 눈물을 흘리는 킬러. 이 남자가 울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크라잉 프리맨>(이케가미 료이치)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잔혹한 폭력과 에로틱한 장면이 많은 이 작품은 일본 성인 만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할리우드에서 실사 영화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공포·판타지:상상력의 극한까지 간다

무더위를 쫓는 데는 역시 공포 만화가 제격이다.특히 일본 작가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는 뼛속까지 오싹오싹하게 만든다. 그의 ‘공포 만화 컬렉션’(열여섯 권)에는 갖가지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소용돌이>는 한 마을에서 갑자기 누군가는 자살을 하고 누군가는 머리가 이상해지는 현상을 다룬 이야기.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는 ‘소용돌이’ 문양이 있다. 노약자·임신부는 ‘관람 불가’.

한국의 공포 만화인 <두 사람이다>(강경옥)에는 수백 년에 걸쳐 저주를 퍼붓는 이무기 이야기가 담겨 있다. 비 오는 날 보면 더욱 오싹오싹한 작품. 한국 최초의 퇴마(退魔) 만화인 <아일랜드>(글 윤인완 그림 양경일)도 눈여겨 볼 만한 작품이다. 무대는 제주도. 정체불명의 퇴마사 반이 재벌 2세인 여주인공 원미호의 신변 보호 요청을 받아들여, 벤줄래·정염귀·병잉태 등 한국적인 요괴들과 맞서 싸운다.

인간·신·악마가 공존하는 중세의 가상 공간을 배경으로 한 <베르세르크>(미우라 겐타로)는 유럽풍 판타지 만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인간에 의해 혹은 악마의 영혼에 의해 유린당하는 인간의 처참한 모습과 선정적인 장면들이 공포스럽다.
순정·코믹:도대체 우리는 누구일까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진지함을 주는 장르이다. 가끔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고, 학창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어른이라면 ‘말 풍선’(대사)을 하나도 놓치지 말 것. 심각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을 때, 기차나 버스를 기다릴 때는 폭소를 유발하는 코믹물이 최고다.

가벼운 작품을 원한다면 <꽃보다 남자>(가미오 요코)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줄리아 로버츠와 리처드 기어가 주연한 <프리티 우먼>의 10대 버전. 일본의 상류층 사립 학교에 진학한 중류층 가정 출신 소녀 츠쿠시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이다. 나이 먹은 성인도 가끔은 어릴 때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는데, 이 만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최신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보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바사라>(다무라 유미)는 ‘순정 만화는 아기자기하고, 단순하다’는 고정관념을 깨트린다. 역사를 다루었으면서도 왠지 판타지 같고, 인간애를 다루었으면서도 사랑 같은 느낌이 남는다. 젊은 부부라면 등장 인물들에 대한 평을 주고받으며 넘기다 보면 재미가 곱절로 늘어난다.

고대 왕국의 네 자매 이야기를 다룬 <아르미안의 네 딸들>(신일숙)에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유형이 나온다. 그래서 만화를 읽다 보면 ‘그 많은 인물 중에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저절로 묻게 된다. 그 덕에 긴긴 만화가 지루하지 않다. <오디션>(천계영)은 주인공이 탐정 친구의 도움을 받아 천재 소년들을 가수팀으로 데뷔시키는 과정을 그렸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게 하면서 N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동거하는 남자는 사진작가를 꿈꾸고 여자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이들 앞에는 어떤 미래가 있을까? <내 집으로 와>(하라 히데노리)는 젊은이들의 ‘꿈’을 그린 청춘 만화다. 어설퍼 보이지만 확고한 젊은이들이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야마시타 가즈미)은 학문과 일상적인 삶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사는, 한 고지식한 교수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만화가 너무 시시하다고? 그렇다면 <우당탕탕 괴짜 가족>(하마오카 겐지)의 등장 인물들과 만나보자. 만화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거침없이 보여준다. 처음 볼 때는 약간 거부감이 들지만, 보면 볼수록 사회적 관습과 위선과 고정 관념이 깨진다. <누들 누드>(양영순)는 널리 알려진 성인 만화. 아직도 만화나 비디오로 안본 사람이 있을까. 성과 관련된 기발한 상상력과 그림이, 본능을 감추고 사는 어른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든다.

<호텔 아프리카>(박희정)에는 가슴 속에 슬픔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머무른다. 그들은 성별·나이·빈부·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뜻한 꿈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

아이들과 함께 볼 만한 만화를 찾는다면 신영우의 <키드갱>이 제격이다. 폭력 조직이 형사의 아이를 맡아 키운다는 조금 황당한 이야기지만, 거기에서 기발한 웃음이 솟아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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