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놀라운 약 아스피린의 비밀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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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 예방 등 탁월한 효능 속속 밝혀져 췌장암·유산·위장 출혈 부를 수도
페닐프로판올아민(PPA) 성분이 함유된 감기약 탓일까. 의약품에 대한 국민 불안이 높아가고 있다. 최근 ‘의약품 부작용’에 대한 행정 당국의 모니터링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면서 불신은 더욱 짙어가는 양상이다. 그러나 약을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세상에는 위약(僞藥)보다 영약(靈藥) 소리를 듣는 약이 더 많으니 말이다.

가정 상비약 가운데 하나인 아스피린도 그 중 하나. 성인들에게 아스피린은 ‘추억의 알약’으로 불릴 만하다. 어릴 때 열이 있거나 두통이 있으면 늘 아스피린을 먹었다. 아스피린의 약효는 빠르고 신기했다. 먹고 몇 시간 지나면 열과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얼마나 신통한지 사람들은 ‘만병 통치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69년 달 착륙 우주선 아폴로 11호 우주인들이 우주 여행에 가져가면서 아스피린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 아스피린 앞에 붙은 ‘영약’이나 ‘만병 통치약’ 같은 말은 좀 과장된 감이 없지 않았다. 기껏해야 열과 통증을 감소시키는 능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그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크게 변했다. 엄청난 아스피린의 효능이 속속 밝혀지면서 미국에서조차 ‘가장 놀라운 약’으로 불리는 것이다. 아스피린의 무엇이 놀랍다는 소리를 듣게 만드는 것일까.

아스피린은 19세기 말 독일의 화학자 펠릭스 호프만이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위해 만든 약이다. 그 뒤 아스피린은 ‘진화’를 거듭했고, 그 덕에 수많은 사람이 만성 통증으로부터 벗어났다. 두통을 앓는 사람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사실 통증은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다. 건강 문제나 질병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반사 작용을 통해 더 큰 위험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유전적 결함에 의해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이 일찍 죽는 것은 그같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이다).
아스피린이 통증을 반감시키는 원리는 간단하다. 아스피린에 함유된 아세틸살리실산이 상해와 감염에 의한 반응을 조절하는 천연 호르몬(프로스타글란딘)의 생합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프로스타글란딘은 통증 전달을 돕고, 혈소판에 신호를 보내 혈병(血餠:피가 응고되어 생기는 덩어리)이 생성되도록 하며, 면역 체계의 국지 반응인 염증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 물질의 발현이 억제되면 그만큼 통증과 열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스피린의 ‘능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970년대 초, 의학자들은 아스피린이 혈소판의 응집을 차단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것은 곧 아스피린이 심장병에도 효과가 있음을 뜻한다. 1980년대 초,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여러 연구 자료를 토대로 아스피린을 뇌경색(뇌졸중)과 심장마비 재발 방지 약으로 승인했다.

1989년에 미국 하버드 의대에서 좀더 진전된 연구가 펼쳐졌다. 찰스 헨켄스 교수(예방의학) 팀은 건강한 남성 의사 2만2천명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5년 동안 한 그룹에는 이틀에 한 번씩 아스피린 325mg을, 다른 한 그룹에는 위약을 투여했다. 그 결과 아스피린을 복용한 그룹의 심근경색증 발병률이 44%나 낮았다.

이후 미국 식품의약국은 아스피린을 아예 심장마비 치료약으로 승인했고, 미국인은 그때부터 아스피린을 다른 목적으로 복용하기 시작했다. 즉 심장마비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심장마비를 예방하기 위해 매일 복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2년 말 현재, 그 인구는 2천6백만명으로 추정된다.

류왕성 교수(중앙대 의대·순환기내과)는 아스피린이 허혈성 뇌졸중 예방에도 우수한 효능이 있다고 말한다. 혈전이 관상동맥을 막으면 심근경색이 발생한다. 그러나 혈전이 뇌동맥이나 경동맥 등을 막으면 뇌의 중요한 부분이 짧은 시간 안에 괴사하는 뇌졸중이 일어난다. 이 질환은 흔히 심한 거동 장애·언어 장애·시각 장애를 수반하는데, 도가 지나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한 해에 50만명 넘게 뇌졸중 환자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들 중 5명에 1명꼴로 사망하며, 3명 중 1명꼴로 장애자가 된다. 2002년 ‘항혈소판 연구인 협회’는 <영국 의학 저널>에 발표한 연구 논문을 통해, 아스피린이 뇌졸중과 중풍의 발병 확률을 25%나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연구진은 뇌졸중 위험에 노출된 사람에게 아스피린을 지속적으로 투약하면 뇌졸중 발생률이 22%나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는 뇌졸중에 노출된 미국인 2천만 명(1999년 자료) 가운데 4백50만 명이 아스피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아스피린은 때때로 비행기 안에서도 빛을 발한다. 비행기의 좁은 좌석에 앉아 오랫동안 여행하다 보면 혈전이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이라고 부르는데, 항공 여행을 시작하기 며칠 전부터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이를 예방할 수 있다(미국은 매년 6만명 이상이 이코노믹 클래스 증후군으로 사망하며, 한국에서는 1998~2002년에 27명이 사망했다).

어디 그뿐인가. 아스피린은 주 5일 근무로 점점 늘고 있는 스킨스쿠버에게도 도움을 준다. 그들이 흔히 겪는 잠수병을 예방하는 것이다. 사람이 바다 속에 들어가면 수압 때문에 뇌동맥 색전증이 발생한다. 그런데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혈소판이 응집되지 않아 색전증에 걸리지 않는다. 당뇨병 후기 합병증을 예방하는 데도 아스피린이 쓰인다. 당뇨병은 심장병과 뇌졸중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당뇨병 환자 중 50% 이상이 후기 증상인 심근경색으로 죽고, 12%는 부작용인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반면 당뇨에 의한 급성 혼수로 죽는 환자 비율은 채 1%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뇨 환자가 아스피린을 장기 복용하면 심근경색과 뇌졸중 발병 가능성이 줄어, 그만큼 사망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호주의 병리학자 가브리엘 쿤 박사는 오랜 연구 끝에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결장암에 걸릴 확률이 인구의 통계적 평균치보다 40%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예방 원리는 간단했다. 종양의 성장을 촉진하는 프로스타글란딘의 생합성을 억제해 암의 발현을 막는 것이다. 하버드 의대 에드워드 지오반누치 박사 팀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건강한 30~35세 미국 간호사 12만2천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아스피린을 장기(최소한 10년) 복용하면 결장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44% 이상 감소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몇몇 연구에서는 아스피린이 전립선암·췌장암·식도암 등을 예방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암 예방을 위해 아스피린을 복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1996년 미국암협회의 대규모 연구 책임자였던 미첼 턴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일부 좋은 결과가 있었지만, 최적 투여량과 적용 증상 및 부작용에 대한 중요한 의문점들이 풀려야 한다. 따라서 아직도 많은 임상 및 병리학 연구가 필요하다.” 만약 턴 박사 같은 의학자들이 궁금해 하는 의문이 일시에 풀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아스피린은 이 세상 모든 약품의 ‘왕중왕’이 될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연구를 통해 아스피린의 새로운 효능들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불임 여성이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가임 확률이 배로 증가한다’ ‘알츠하이머 발병 위험을 줄인다’ ‘뇌종양인 다형성아교종(多形成芽膠腫)을 예방한다’ ‘잇몸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아스피린을 소량 복용하면 치주염에 걸릴 확률이 낮아진다’ ‘20~74세 사람이 실명하는 가장 큰 원인인 당뇨성 망막염 예방에 도움을 준다’ ‘유방암 발병을 막아준다’ 등이 비교적 최근에 밝혀진 효능들이다. 그러나 이런 ‘기적’들은 좀더 검증을 거쳐야 신뢰받을 수 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 약의 효과가 있으면 부작용이 있는 법. 이 법칙은 아스피린에도 적용된다. 의사들은 ‘어떤 약에 부작용이 전혀 없다면 내세울 만한 효과도 없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그렇다. 아스피린을 복용한 뒤에도 부작용이 나타난다. 가장 흔한 부작용은 속이 쓰리고 아픈 위궤양이다. 심하면 위장 출혈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 다른 부작용은 항혈소판(피를 굳지 않게 하는) 작용으로 인한 ‘지혈 방해’이다. 생리·출산·수술을 앞둔 사람에게 아스피린 복용을 금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독감이나 수두에 걸린 16세 이하 어린이가 아스피린을 먹으면 간혹 라이 증후군이 발생하기도 한다. 라이 증후군은 인플루엔자나 수두 등 바이러스성 질환에 걸린 어린이에게만 일어나는 드문 병이다. 급성뇌증과 함께 간의 지방변성을 수반하는 질환으로서 지나치면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이 외에도 최근 들어 좀더 연구가 필요한 부작용들이 하나 둘 발표되고 있다. 지난 3월6일, 미국 CBS 인터넷판은 ‘임신 초기나 수정 단계에서 아스피린을 먹으면 유산 확률이 80%에 이른다’는 내용을 한 의학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1월에는 더 심각한 내용이 공개되었다. 미국 하버드 의대 에바 쉐른 박사가 아스피린을 장기 복용해온 여성 8만8천명을 18년간 추적한 결과, 1주일에 325mg 이상을 장기 복용한 사람이 가끔 복용한 사람에 비해 췌장암에 걸릴 위험이 58%나 높았다. 또 20년 동안 1주일에 14정 이상 복용한 사람은 전혀 복용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췌장암 발병 위험이 86%나 높았다.

2002년 한국에서 사망한 사람은 모두 24만7천 명. 그 가운데 사망자를 가장 많이 낸 질병은 암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사망자를 많이 낸 질병은 뇌혈관질환·심장질환·당뇨병 순서였다. 이 통계는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 아스피린이 필요함을 뜻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아스피린에 대해 무지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 약을 먹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류왕성 교수는 “적어도 심근경색증·불안정형 협심증·안정형 협심증·뇌경색·일과성 뇌허혈 환자는 2차 발병을 막기 위해 복용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 동맥경화 위험 원인(고혈압·당뇨·흡연·고콜레스테롤) 가운데 두 가지 이상을 지닌 사람도 복용 대상자이다. 그렇다면 가족 병력에 심혈관계 질환이나 당뇨가 있다면 예방 차원에서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글쎄, 그런 분이라면 먼저 의사와 상의하기를 권한다.

도움말:류왕성 교수(중앙대 의대·순환기내과)·배종화 교수(경희대 의대·순환기내과)·하종원 교수(연세대 의대·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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