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금호 산돌커뮤니케이션 대표
  • 오윤현 기자 (noma@e-sisa.co.kr)
  • 승인 2001.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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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은행장'의 행복한 이중 생활

산돌커뮤니케이션(산돌)은 한국의 몇 안 되는 메이저급 '글자 은행'이다. 지난 10여 년 산돌은 개성 있는 한글 서체를 100가지 넘게 개발해 냈다. 그 중에는 유력 일간지의 본문·헤드라인으로 쓰이는 서체도 있고, 단행본 표지를 아름답게 꾸민 글자도 있다. 최근에는 옛 한글 활자 꼴을 디지털화한 '옛 멋 글씨'를 내놓아 호평을 받고 있다.

석금호 산돌 대표(46)는 이 모든 글자의 산파이다. 그리고 활자가 독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꽤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요즘 그는 한국에서 꽤 잘 나가는 글자 은행의 대표이자 서체 연구가로 평가된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남모르는 '고생'을 자처하고 있다. 1주일에 서너 번씩 산돌을 벗어나 '이중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목사로서 '부초 인생'들에게 보금자리 제공


지난 2월23일 오후. 서울 대학로 근처 산돌 사옥에서 만난 석씨는 조금 분주해 보였다.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일을 지시할 때의 모습은 영락없는 한 기업의 대표였다. 잠시 뒤 그와 함께 사옥에서 대학로 쪽으로 서른 걸음쯤 걸어 내려와 쉴터공동체(쉴터) 간판이 달린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낡은 한옥 네 채가 머리를 맞댄 쉴터의 뜰은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꽤 널찍했다. 마루가 달린 가옥 안으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교회였다. 교회 안에는 다른 교회처럼 기다란 의자가 없고 대신 따끈한 온돌이 깔려 있었다. 한쪽 벽에 나무 십자가만 없으면 그저 일반 집 안방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랬다. 석씨는 이 교회(기독교 침례회) 목사(1998년 안수를 받았다)이자 쉴터의 대표였다. 그는 "오갈 데 없는 사람 20여 명과 함께 이곳에서 채송화처럼 옹송거리며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석씨가 공동체 문을 연 것은 1990년. 젊은이들이 들끓는 대학로 한 구석에 한옥 네 채를 사서 담을 허물고, 부초처럼 떠도는 외롭고 가난하고 위태로운 사람들을 데려 왔다. 심신이 불안정한 사람들과 살다 보니 험한 일도 여러 번 겪었다. 정신 없이 맞았는가 하면, 칼부림까지 당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한 해 수천만원씩 쏟아 부으며 공동체를 운영하는 이유는 특별하다. 남다른 종교적 체험에서 우러난 사랑 때문이다.

그에게는 '어두운 과거'가 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지독한 염세주의자였다.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늘 어둡고 우울하게 지냈다. 관심거리란 오로지 죽음밖에 없었다. 군에 입대해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1978년 10월15일 밤, 허무감이 절정에 달했다. 1주일 휴가를 갔다온 뒤 야간 상황실로 올라갔을 때였다. 자살 욕구가 강렬히 일었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그는 잠시 침상에 누웠다. 그때 스쳐 지나는 얼굴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그러나 10년 넘게 다져진 허무감은 모정을 가볍게 뭉개버렸다.

그를 구한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 권의 책이었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 불쑥 내무반에 꽂아둔 책 한 권이 떠올랐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가 쓴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내무반에서 그 책을 들고 와 휘리릭 책을 펼치는데, 유독 한 문장이 눈에 와 박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그 구절을 눈으로 더듬는데, 갑자기 부드러운 음성이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종교적 체험이 전혀 없었지만, 대번에 그는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 순간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내렸다. 여덟 시간을 울고 나서 아침에 보니 담요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삶의 벼랑에서 벗어난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회색빛 일색이던 세상이 다음날 아침에 전혀 다르게 보였다. 전에는 동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러웠는데,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모두 껴안고 싶어졌다. 산 속의 물소리,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점,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만 보아도 눈물이 핑 돌았다. 석씨는 "내면의 고통이 컸던 만큼 감동도 컸다. 석 달 내내 그런 기분이었다"라고 말했다.

대학(홍익대)을 졸업하고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월간 <리더스 다이제스트> 미술부였다. 그곳에서 아트디렉터 김진평씨(뒤에 서울여대 교수를 지냄)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를 만나 한글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수동 사식에 쓰이던 명조체·돋음체 등은 모두 일본 제품이었다. 판권도 일본 회사가 갖고 있었다. 그 사실은 디자이너인 석씨의 가슴을 분노로 가득 채웠다.

참을 수 없는 울분을 느끼며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민족의 역사와 얼이 배어 있는 한글 서체를 한국인의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였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같이 공부한 동료들이 잘 나가는 광고계나 대학으로 나설 때, 그가 산돌타이포그라픽스라는 서체 회사를 세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아직 서체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회사는 줄곧 흔들렸다. 다행히 대학에 출강해 간간이 입에 풀칠은 했지만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1988년, 끝내 더 버티지 못하고 회사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독일로 유학했다. 볕이 든 것은 1990년대 초. 서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매킨토시가 보급되면서부터였다. 비로소 서체를 상업화하는 데 성공했다. 맨 처음 보급한 서체는 산돌60 조합형이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소비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한 글자체 개발에 꼬박 서너 달이 걸렸지만 힘든 줄 모르던 시기였다.


'단아체' '마루체' 등 한글 글자체 만들어 호평


잘 나가는 회사가 되었지만 그는 두 가지 원칙을 지켰다. 우선 유행에 편승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량 생산을 피했다.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질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절제와 노력 끝에 요즘 산돌이 만든 단아체·마루체·피카소체·퍼즐체·광수체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에게 우리나라 서체 수준을 점수로 매겨 보라고 했더니, 인색하게도 50∼70점밖에 안 주었다. 기초 연구와 예술적인 표현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전망이 밝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2월 말, 석씨는 강원도 홍천의 깊은 산골에 있었다. 목조 주택 두 채와 포도밭 수천 평이 펼쳐진 골짜기는 3년 전 그가 원대한 꿈을 갖고 마련한 공간이다. 석씨는 이곳에서 다른 식구들과 함께 도시 공동체에서 할 수 없는 대안 교육을 펼치면서, 친환경적인 공동체를 일굴 예정이다. 그는 1주일에 2,3일씩 이곳에 들러 농사꾼이 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루 종일 그의 '가나안'으로 따스한 햇볕이 푸짐하게 쏟아져 내렸다. 켜켜이 쌓였던 눈이 녹아 내리자 땅이 서서히 드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씨는 그곳에 희망을 잉태한 씨앗을 뿌리리라. 욕망과 이기심으로 어수선한 세상이 변하지 않는 한 그의 이중 생활과 '씨앗' 뿌리기는 계속될 것이다.

● 프로필 :
1955년 광주 출생.
홍익대 미대·대학원 졸업.
1988년 독일 유학.
1991년 산돌글자은행 설립.
현재 (주)산돌커뮤니케이션 대표이사.
쉴터공동체 대표.
'글자 은행장'의 행복한 이중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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