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본능의 해방구' 인터넷의 괴력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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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체계·가치관 독특한 네티즌,
가상 현실의 법칙·논리 따라 행동




"20세기와 함께 텔레비전의 시대는 저물었다. 이제 그 빈자리를 인터넷이 채우고 있다"라는 한 미디어 학자의 말처럼, 이제 인터넷은 텔레비전에 이어 '제2의 미디어 왕'으로 등극한 것으로 보인다. 텔레비전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부작용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 대신 인터넷에 대한 관심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그리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인터넷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20세기 미디어의 왕 텔레비전과 21세기 미디어의 왕 인터넷은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텔레비전이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대량 전달하는 대중 매체(매스 미디어)인 데 반해 인터넷은 원하는 사람에게만 정보를 제공하는 개인 매체(퍼스널 미디어)이다. 텔레비전이 유일신 체제라고 한다면, 인터넷은 다신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서로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대중 사회가 완성되었다면, 인터넷을 통해서는 '그들만의 사고 체계와 독특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새로운 부족사회'가 만들어졌다. 사이버 세상이라는 '또 하나의 사회'에서 '또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네티즌들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부족민이다. 그들은 '게임 부족' '채팅 부족' '자살 부족'이라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사이버 세상을 살아간다.

새로운 미디어가 처음 등장할 때는 언제나 기대와 함께 기우도 뒤따랐다.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발명했을 때 교황청은 사람들이 모두 글로 써진 음란한 얘기를 읽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폭력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방 범죄를 염려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라도 한 것처럼 인터넷을 통해 흉악범이 되어버린 네티즌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인터넷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이버문화연구소 민경배 실장은 최근 벌어진 인터넷 관련 사건들의 원인은 대부분 인터넷 밖에 존재했다면서, 인터넷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이 '불온하다, 음란하다, 혹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규제된다면 인터넷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 또한 제한받을 것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물의를 빚은 인터넷 관련 사건들은 대부분 그 원인이 현실에 있었다.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반 자살한 사람들의 경우도 인터넷은 원인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그들이 자살하게 된 이유는 현실에 존재했다. 인터넷은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서로 만나게 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을 뿐이다. 중학생으로부터 어린이 포르노CD를 구입한 사람 중에 중학교 교사까지 있다는 사실, 여고생과 원조 교제를 한 사람 중에 고등학교 교사까지 있다는 사실은 사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터넷도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 관련 사건을 설명할 때 흔히 동원되는 이유가 '현실과 가상을 혼동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양은 박사(한국외국어대 강사·미디어 교육학)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그는 "인터넷으로 인한 범죄는 가상 현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법칙보다 가상 현실의 법칙을 더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사람들이 현실 세계가 아니라 가상 세계를 준거 집단으로 삼고 있다는 데에서 문제가 출발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새로운 범죄자 배양




사이버 세계의 논리가 현실의 논리보다 우위에 서면서 인터넷이 범죄의 단순한 중개자 역할을 넘어 인터넷을 통해 범죄가 '자가 발전'을 이루기도 한다. 자살 사이트에 심취한 초등학생이 자살한 사건은 인터넷이 범죄의 수단에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것은, 자살 사이트에서는 자살이 미화되고 찬양되는 등 '죽음의 논리'가 바로 '메인 스트림'이었기 때문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범죄심리과 함근수 연구원은 "인터넷 사이트에 몰입되어 있는 청소년들의 경우 사이트 안에서만 통용되는 논리에 매몰되기 쉽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곧 그곳이 준거 집단이 되어 그 논리대로 행동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분석했다. 아직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네티즌들이 사회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사고 체계를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가상 세계의 논리를 따르는 것일까? 그것은 가상 세계의 논리가 이성이 아니라 본능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사람들은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본능을 드러낸다. 특히 금기시되었던 성욕과 공격욕이 인터넷에서 숨통을 트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은 공격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이버 훌리건들의 욕설과 험담으로 얼룩지기 일쑤이다. 채팅은 오프라인에서의 대화보다 더 험악해져서, 채팅하다가 언어 폭력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성욕 또한 인터넷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발산되고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현수 박사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은 다시 원시 시대의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화상 채팅방 등을 통해서 만인 대 만인의 (사이버) 섹스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존 성의식은 급격히 붕괴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경찰청 범죄심리분석자문위원인 홍성열 교수(강원대·심리학)는 "본능을 부추기는 것은 인터넷이 가진 익명성과 비대면성이다"라고 지적했다. 익명성·비대면성의 조건에 돈이라는 유혹까지 보태지면 인터넷은 범죄의 온상이 된다. 현실 세계의 범죄자가 인터넷으로 공간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새로운 범죄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린이 포르노 사이트나 폭탄 사이트 관련 학생들은 우등생이거나 평범한 학생이었다. 원조 교제를 한 여중생 중에는 전교 1등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지금의 인터넷 교육은 대부분 기능 위주의 인터넷 활용 교육이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제7차 교육 과정에도 인터넷 교육이 포함되었지만 인터넷 활용 교육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정보의 바다에서 접할 정보의 양뿐만 아니라 정보의 질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인터넷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나 인터넷 범죄를 수사하는 경찰의 공통된 인식이다.

김양은 박사는 "기술적 활용 능력을 기르는 것 외에 문화적 수용 능력, 비판적 평가 능력을 두루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인터넷의 위험성이나 부작용을 알고 무엇이 죄가 되는지 알게 해야 한다"라고 수용자를 염두에 둔 미디어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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