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자연 다큐/영장류 깊이 보기③] 원숭이 사회
  •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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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사회에도 '한국 정치' 있다
권력 둘러싸고 수컷끼리 이합집산 다반사…권모술수도 난무


사진설명 '정치하는 원숭이' : 영장류 사회에도 마키아벨리가 혀를 내두를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한다. ⓒSYGMA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개혁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겨우 반 세기 남짓한 민주주의 역사를 통해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것을 삼키려다 걸린 어쩔 수 없는 소화 불량이지만, 더 늦기 전에 새롭게 거듭나기 위하여 스스로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고 있다. 개혁 규모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그 당위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개혁을 하자는 것은 한마디로 투명한 사회를 만들자는 얘기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정당한 기회가 주어지고 노력에 대한 평가가 공평하게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개혁의 발목에는 늘 '끈'이 칭칭 휘감겨 있어 말썽이다. 이른바 혈연, 학연, 또는 지연이 특별히 질긴 끈들이다.


영장류 세계에 영원한 실세란 없다


혈연은 참으로 끊기 어려운 끈이다. 오죽하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생겼겠는가. 영장류 사회는 기본적으로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유인원의 경우만 본다면 오랑우탄이 가장 단순한 사회 구조를 지닌다. 암컷은 발정기 때 수컷을 만나 짝짓기를 한 후 혼자서 자식을 기른다. 긴팔원숭이는 부부가 늘 같이 붙어 다닌다. 고릴라·침팬지·보노보는 모두 포유류의 전형적인 사회 구조인 일부다처제를 이루고 산다.

우리 인간도 기본적으로 일부다처제 성향을 띠는 포유류의 일종이다. 대부분의 현대 문명 사회가 법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수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따르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종족의 수를 세면 일부다처제 사회가 압도적으로 많다. 몰래 남편을 여럿 두고 사는 여성보다는 부인을 여럿 숨겨두고 사는 남성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한 남성이 부인을 여럿 거느리는 예는 드물어졌지만, 이혼한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훨씬 자주 재혼하는 것을 보더라도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포유동물이다.

물리학자들이 그들 중 가장 높은 지능지수를 가졌던 이로 뉴턴을 꼽는다면, 생물학자들은 흔히 영국의 유전학자 J.B.S. 홀데인을 내세운다. 다른 사람과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그가 학교앞 주점에서 나누었다는 대화 내용들이 지금도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다. 그 중 하나다. 어느 날 홀데인에게 누군가가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아니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내 죽음이 형제 둘 이상이나 사촌 여덟 이상을 구할 수 있다면 모를까"라고 답했다 한다.

이 말은 유전학자의 답변인 만큼 어디까지나 유전자의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 형제는 유전자의 50%를 공유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유전자를 각각 반씩 물려받았기 때문에 똑같은 유전자를 지닐 확률이 50%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아버지나 이모의 자식들을 촌수를 따져 사촌이라 부르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8분의 1을 공유하는 사이다. 홀데인은 만일 형제 둘 이상 또는 사촌 여덟 이상, 즉 자신의 유전자와 맞먹는 양 이상을 확보할 수 있다면 죽음을 무릅쓸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사진설명 '가족' 지키기 : 다른 수컷들로부터 처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경계하는 고릴라의 모습. ⓒTim Knight(www.selu.com/bio/gorilla)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 특히 사회적 동물들은 모두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구성된 사회에서 산다. 그리고 내 부모 형제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 몸 안에 앉아 있는 유전자가 보기에 흡족한 일이다. 아무리 세습하지 말아야 한다고 부르짖어도 재벌 총수 또는 심지어 목사도 자기 자식에게 기업과 교회를 물려주려 한다. 종친회에만 가면 균형 감각을 잃는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나는 지극히 동물적인 냄새를 맡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교양 과학서인 <정치하는 원숭이(Chimpanzee Politics)>의 저자이자 제인 구돌과 함께 침팬지 연구의 큰 축을 이루는 위대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침팬지 사회에서는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더 중요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사회에서도 끈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영장류 사회에서도 물론 가족과 친지의 보호 속에 사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확실한 것은 으뜸 수컷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영장류의 행동을 관찰하다 보면, 별로 몸집이 크지도 않은 수컷이 으뜸 수컷의 후광을 업고 객관적으로 자기보다 힘이 센 버금 수컷들을 윽박지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어린 수컷을 으뜸 수컷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느긋이 바라볼 뿐이다.

우리 사회에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진다. 왕초는 가만히 있는데 바로 옆 졸개들이 더 날뛴다. 실세는 점잖게 뒤에 숨어 있고 깃털들이 나서서 약자를 윽박지른다. 그러다 자기가 믿고 기대던 실세가 거꾸러지면 그들은 잽싸게 새 강자에게 허리를 굽힌다. 물론 일선에서 물러선 '어른'에게 평생 충성을 다하는 의리 있는 부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마음을 고쳐 먹는다.

영장류 사회에서도 영원한 실세란 있을 수 없다. 특히 침팬지 사회의 권력 구조는 대단히 유동적이다. 다른 모든 수컷들 위에 홀로 오랫동안 군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침팬지 수컷들은 종종 동맹을 맺는다. 드 발 박사가 관찰한 네덜란드 아른헴 동물원 침팬지 무리의 정치판은 그야말로 춘추 전국시대였다. 마키아벨리가 혀를 내두를 법한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면서 어느 수컷이 어느 수컷과 은밀하게 손을 잡느냐에 따라 권력 구조가 달라진다. 3김 중 아직도 정치 일선에 있는 양김이 공조를 다짐하며 서로의 손을 맞잡는 모습에서 나는 침팬지를 본다.


인간이 침팬지와 달라야 하는 이유


아무리 공정하려 해도 청탁과 외압이 끊이지를 않는다. 도대체 망하기 힘든 사업인 금융업이 무너지는 나라가 바로 우리 나라다. 예금 이자보다 대출 이자가 당연히 더 높은데 왜 망할까. 수익성이 있을 만한 사업을 잘 판단해 돈을 빌려주기만 하면 절대로 망할 수 없는 것인데 망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누군가가 그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넘어갈 줄 뻔히 아는 곳에도 압력에 못 이겨 돈을 빌려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금융업이라고 뾰족한 재주가 있으랴.

지구의 역사인 46억년을 12시간으로 환산한다면 11시59분이 지난 한참 후에야 우리 할아버지가 침팬지 할아버지와 헤어졌다. 그 침팬지들은 아직도 온갖 끈에 얽혀 있다. 우리도 작은 공동체 단위로 살던 시절에는 끈끈하게 얽혀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진화한 포유동물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다만 석기 시대로부터 너무나 빨리 현대로 뛰어온 것이 문제다. 끈에 초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유전자는 우리 몸 속에 없다. 침팬지와 달리 진정 인간답게 살려면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자연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전자의 명령을 거스를 줄 아는 동물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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