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윤정 박사의 자연 다큐] 나무 바로보기(2)/향기는 꽃들의 '생존 몸부림'
  • 차윤정 (산림생태학 박사) ()
  • 승인 2001.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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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식 도울 곤충 끌어들이는 수단…시체 썩는 냄새 풍기는 꽃도


열대 우림에서 자라는 라플레시아는 잎이 없는 '기생꽃'이다. 줄기인 동시에 뿌리인 조직을 다른 나무의 조직에 박아 살아가기 때문에 잎이 필요 없다. 하지만 남의 자양분을 빼앗아 먹으면서 피워낸 꽃의 크기는 무려 1m에 달한다. 게다가 동물의 시체가 썩는 듯한 악취까지 풍긴다. 그 악취 때문에 원주민들은 라플레시아를 '시체꽃'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 악취를 끔찍하게 여기지만, 파리들은 이 악취에 홀려 등에 꽃가루를 실은 채 라플레시아를 드나들며 꽃의 번식을 돕는다. 나무뒤쥐는 이 거대한 꽃의 열매를 먹고 씨앗을 전파한다.




바닷가 갈매기 집단 서식지 근처에서 주로 자라는 죽은말아룸이라는 식물 역시 부패한 고기 냄새를 풍긴다. 갈매기 서식지는 죽은 갈매기와 물고기가 썩는 곳이자, 부화하지 못한 알과 배설물 등 단백질이 부패하는 냄새로 진동하는 곳이다. 이 냄새를 좇아 파리떼가 모여드는 이 곳에서 죽은말아룸이 단백질이 부패할 때와 유사한 냄새를 피우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냄새는 인간에게는 유쾌하지 않아도 파리를 홀리기에는 충분한 향기인 것이다.


미스킴라일락은 독특한 향기와 아름다운 꽃으로 세계인에게 사랑 받는 꽃나무이다. 이 나무는 원래 한국의 털개회나무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의 성향에 맞도록 개량된 것이다. 이 나무가 발견된 곳은 높은 산의 암벽 틈이었다. 나무는 아무도 찾지 않는 높고 험한 곳에서 자신을 알리기 위해 눈물겨운 향기를 피워내는 법을 터득했다.


요즘 우리 산야를 붉게 태우는 진달래는 일찍 꽃을 피우는 '부지런함'으로 인해 별 다른 경쟁을 거치지 않고도 곤충을 독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진달래의 사촌인 철쭉은 수많은 경쟁 식물이 꽃을 피우는 여름에 자태를 드러낸다. 철쭉이 다른 꽃들과 경쟁하기 위해 진달래에게는 없는 향기를 만들어낸 까닭이다. 이른 봄에 피는 목련꽃은 향기가 없지만 사촌인 함박꽃나무가 요란한 향기를 풍기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사는 곳 척박할수록 향기 강해




대체로 사는 곳이 척박하고 힘든 꽃일수록 향기가 강하다. 계방산 1500m 고지에서 피어나는 꽃개회나무나, 가을날 고산의 맞바람 속에서 피어나는 구름국화꽃의 향기가 유난히 강한 것도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식물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냄새는 살아 남기 위한 고도의 생존 수단이지만,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장치이다. 냄새는 꽃이나 열매의 위치를 알려 곤충이나 동물을 유인하거나, 반대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경고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향기와 악취는 어떤 기준으로 정해지는가. 식물의 처지에서 향기와 악취의 구분은 없을지도 모른다. 목적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을 쓸 뿐이다. 파리나 쥐의 처지에서 단백질이 부패하는 냄새는 먹잇감의 위치를 알리는 향기이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대부분의 곤충이 향기 쪽으로 적응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른바 향기라 부르는 냄새를 피워내는 식물이 우리 주위에는 훨씬 많다는 점이다. 가을날 은행나무 열매의 고약한 냄새 정도는 차라리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라플레시아의 악취든 철쭉 향기이든, 식물이 풍기는 냄새는 모두 삶에 대한 건강한 의지이자 경쟁에서 승리한 '성취물'이기에 찬사 받을 가치가 있다. 생선장수의 몸에 밴 비린내나 아줌마들의 몸에 밴 생활의 냄새가 값비싼 인공 향수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될 수 있듯이. 내가 피워내는 삶의 향기는 어떤 것인지, 꽃들이 피어나는 이 계절에 한번쯤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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