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 장영희 기자 (jjang@e-sisa.co.kr)
  • 승인 2001.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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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도래할 가능성 있다"


"현단계에서 최선책은, 구조 개혁은 그것대로 원칙적이고 속도 있게 추진하되 전반적인 거시 경기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정책을 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외 불안 요인에 짓눌린 한국 경제가 과연 순항할 수 있을까. 재정경제부장관에서 한국 최대의 두뇌 집단 수장으로 변신한 강봉균 한국개발연구원장을 4월11일 만나 경기 진단과 대응책을 들어 보았다. 강원장은 경제를 보는 눈이 정부보다 다소 비관적이었지만, 관료 출신답게 정치권·노동 세력·지식인 집단에도 구조 조정이 지연된 책임이 없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기 진단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경제는 올 들어 개선되는 조짐이 있었습니다. 산업 생산·수출 증가율·심리 지수 등이 지난해 4/4분기보다 좋아진 것이죠. 경기가 지난해 하반기를 저점으로 하여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었고,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정부가 보듯이 하반기에 더 좋아질 것이냐인데, 회의적입니다. 대외 여건이 너무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일본의 경제 상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올해 경제 상황이 나빠질 것은 미국과 일본 경기가 동반 하락하는, 수십 년 만에 처음 맞는 상황 때문입니다. 미국 경제를 낙관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재래식 경제가 아닌 신경제라는 점을 신봉해 경기가 4/4분기부터 빠르게 회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10년 동안의 장기 호황을 이끈 IT산업의 위력을 믿는 것이죠. 저는 미국이 설혹 신경제라 하더라도 호황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1년 안에 회복세로 돌아서기는 어려울 것으로 점칩니다. 일본 경제에 대해서는 비관론이 우세합니다. 구조 개혁을 추진할 정치 리더십이 없는 데다 경기 조절책을 쓸 형편도 못됩니다.


대통령이 앞으로 3개월을 비상기로 규정하는 등 정부도 낙관론에서 한 발짝 물러났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곧 수정 전망을 내놓을 텐데, 연초 5%대 성장률 전망보다 1% 포인트 정도는 낮추어질 것입니다. 2/4분기 지표가 나오면 세계 경제에 대한 엇갈린 시각의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이나 1998년처럼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겠지만, 불황이 도래할 가능성은 없지 않다고 봅니다. 3% 미만 성장률은 불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기 부양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요.


내수 진작책을 펴야 한다고 하니까 당장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경기 부양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조 조정을 지연시키고 부실 기업들이 살아나게 되어 경제를 더욱 어려운 국면에 빠뜨릴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나 대우 같은, 우리가 다 아는 부실 기업들은 정부가 어느 정도 부양책을 펴더라도 나아질 것이 하나도 없는 기업들입니다. 문제는 지금 괜찮은 기업들이 경기가 더 나빠져 부실기업군에 합류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단계에서 최선책은, 구조 개혁은 그것대로 원칙적이고 속도 있게 추진하되 전반적인 거시 경기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정책을 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구조 개혁이 지연되어 안팎에서 시장 신뢰를 잃고 있는 형국 아닙니까.


저는 큰 틀에서 한국 경제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경제 시스템을 바꾸는 변화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30년 동안의 경제 발전사에 큰 획을 그을 중요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구조 조정이라는 고통과 비용을 치렀습니다. 그런데도 긍정적 효과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어 국민들이 불안과 불만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조 조정의 효과는 더디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구조 조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비판을 정부가 듣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속도가 둔화한 것에는 비경제적 요인들이 작용했던 겁니다. 정부가 외환 위기를 극복했다는 자만에 빠져 안이해진 것이 아닙니다.


비경제적 이유란 무엇입니까?


우선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당이 안정 의석을 얻지 못한 탓에 지난해 내내 정부가 여당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졌습니다. 노동자 집단은 구조 조정에 계속적인 저항 세력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식인 집단이 구조 개혁에 합의의 목소리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언론도 정부가 잘하는 일은 격려하고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서포터(지지자)보다 크리틱스(비판자)에 포위된 형국이어서 정부로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습니다.


여당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과반이 안되더라도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은 한마디로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얘기입니다. 경제하는 사람이 이런 얘기하는 것은 우습지만, 요즘 개헌론이 불거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러 임기를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대통령 임기 중간에 국회의원 선거를 해서 그 결과 여소야대가 되면 대통령보고 일하지 말라는 얘기와 같습니다. 이 시스템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어요.


벌써부터 레임 덕이 들먹여지고 하반기부터 대선 정국에 돌입할 가능성도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중심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정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설혹 미국 경제가 어려움에 빠지더라도 새로운 수출 시장을 개척하고 투자와 민간 소비를 진작하는 정책을 구사해야 합니다.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금융 시장이 정상화하고 주식 시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물 경제도 회복되는 선순환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증시가 회복되려면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하고 그러자면 구조 조정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부실 기업에 자꾸 돈을 대주지 말라는 얘기죠.


그렇다면 더욱 정부에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여러 가지 이유로 좌고우면해 그런 비판이 나올 겁니다. 가령 현대를 연명시키지 말고, 회사채 신속 인수도 출자 전환도 하지 말고 원칙적으로 대응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전반적으로 시장의 신뢰를 얻고 금융기관 부실로 파급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부는 그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아 그런 선택을 한 것이죠.


차라리 특혜 소리를 듣더라도 정부가 확실하게 개입해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혼란과 비용을 줄이는 일 아닙니까?


현대 같은 부실 기업 처리에는 정부의 방침도 확고해야 하지만 금융기관들이 따라 주어야 합니다. 당장의 부실을 두려워해 기피하다 보니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또 정부가 힘을 받지 못하는 현실적 난관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령 대우차를 어떤 조건에서라도 파는 것이 더 낫다는 여론이 조성되면 정부가 왜 하지 않겠습니까.


칼자루를 쥔 것은 정부니까, 결국 관료들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관료 집단은 국회 상황도 보아야 하고 언론도 의식해야 하고 사회 안정도 고려해야 합니다. 관료에 대한 기대치의 눈높이도 다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용기 있고 소신껏 일하는 관료에 대해 사회적 존경은 커녕 비난만 퍼붓지 않습니까. 관료들이 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잘하는 것은 격려해야 합니다.


정부에 계실 때와 차이가 있겠지요?


고려해야 할 현실적 제약이 훨씬 적어 경제 논리에 충실할 수 있고 중장기적으로 경제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정부에 있을 때는 크라잉 디맨드(화급한 수요)가 있어 항상 급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도 장관 시절이 좋으셨지요? 정치 활동은 다시 안 하실 겁니까?
다 끝난 얘기…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은) 애프터서비스 차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치 안하려고 하니까 이 곳에 온 것 아니겠어요.


● 프로필 :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서울대·한양대 경제학 박사.

경제기획원 차관·총리 행정조정실장

정보통신부장관·청와대 경제수석·재경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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