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신]어머니 지리산의 정화수, 섬진강(5월10~11일)
  • 이문재 취재부장 (moon@sisapress.com)
  • 승인 200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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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쏜 화살은 반드시 땅에 떨어진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게'를 맹신하는 개발 지상주의가 바로 인간이 쏜 화살이다.

저 화살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땅이 죽고 물이 죽는다. 근대화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래 무수하게 발사된 화살이 도처에 떨어지고 있다. 도보 순례단은 '앓아 누운' 섬진강 유역을 따라 올라간다.

 
5월10일, 목요일. 8일 째. 순례 기간 중 단 하루뿐인 운행조정일(휴일)이다. 어제, 대원들은 바람 속에서 저마다 깃발이었다. 바람은 걷는 순례자들을 모두 깃발로 만들었다('바람은 나를 깃발로 만들고'라는 한 삼류 시인의 노랫말이 있었다). 선청에서 하동으로 넘어온 순례단은 하동읍과 광양군 다압면을 잇는 섬진교를 건너, 강변 둔치에 천막을 쳤다.

해가 질 때, 해무리 같은 무지개가 잠깐 보였다. 커다란 반원을 그리지 못한데다, 동쪽이 아니라 서쪽 하늘, 해 주위에 뜬 짧은 무지개라니. 섬진강 무지개는 작고, 희미하고, 허약했다.

섬진강은 '특별한 강'이다. 섬진강은 타지 사람들에게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맑은 강'으로 입력돼 있다. 어머니 지리산의 정화수 같은 강. 어머니 지리산의 눈물 같은 강. 기다림의 강, 서러움의 강. 섬진강은 현실 안에다 이상향을 건설하겠다는 '반역'은 물론, 마음 안에서 정토를 발견하겠다는 '용맹정진'을 두루 감싸고 돌았던 것이다.

'섬,진,강'이라고 발음해 보라. 김용택의 시들도 섬진강 강물 속에 흐른다. 김용택의 시편들은 섬진강을 근대화의 그늘로서의 강으로 다시 흐르게 했다. 섬진강은 김용택 시인의 가슴 속으로 유입돼, 분노의 강, 절망의 강, 그리움의 강으로 다시 흘러나왔다. 섬진강은 역사의 강, 문학의 강, 인간의 강인 것이다.

구례 쪽에서 내려오며, 피아골, 쌍계사 등 지리산이 흘려보내는 맑은 계곡물을 받아마시는 섬진강은 하동읍 앞에서 한번 크게 에스(S) 자를 그린다. 섬진강은 넓어질대로 넓어지고, 느려질대로 느려져 있다. 강이기를 포기하고 바다가 되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물비린내 나는 강물은 이제 소금기를 머금어야 한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바퀴 커다란 원을 그리는 도보순례는 하동읍에서 6시 지점을 통과한다. 정확히 반원을 그린 것이다. 강 건너, 세상의 달력은 목요일이지만, 섬진강 둔치에서 운동화를 벗고 있는 순례단에게는 유일한 휴일이다. 땀내에 찌든 옷들을 빨고, 필요한 물건을 사는가 하면, 책을 읽고, 일지를 정리하거나 편지를 쓴다. 걷는 순례자들은 세상 밖으로 너무 멀리 걸어나와 있는 것인가.

하구에는 핵폐기물 처리장, 상류에는 댐

취재팀은 강으로 올라섰다. 하동 지역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핵 폐기물 처리장 설치 문제 때문이었다. 읍내에서 하동민주청년회(하민청) 전 회장 최석봉씨를 만났다. 내일 악양면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 하동 핵폐기물 처리장(이하 처리장) 설치 반대를 위한 군민 연대의 밤이 열릴 예정이다.

최씨와 함께 하동읍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20여 분을 달렸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갈사만. 몇 년 전, 현대제철이 들어오기로 했던 지역이다. 이 갈사만 일대와, 북동쪽에서 갈사만을 내려다 보는 금오산이 처리장 예정지로 알려져 있다. 금오산 앞에는 하동화력발전소가 우뚝 서 있다.

지난해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핵처리장 설치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지난 1월19일. 원자력환경기술원에서 처리장 유치를 위한 유인물을 돌린 것이다. 하민청은 1월22일, 핵폐기물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알리며, 처리장 설치는 절대 불가하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돌렸다. 이후 하동 군청이 언론을 통해 '지역에서 원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의사를 밝혔다.

지난 2월 하순, 처리장 유치를 찬성하는 시민단체가 구성되고, 3월 하순, 하민청을 중심으로 한 처리장 반대 대책위가 구성되면서 처리장 설치 문제는 가장 큰 지역 현안으로 떠올랐다. 처리장을 유치하면 하동군 3년 치 예산에 버금가는 3천억 원을 지원한다는 조건이 제기되었고, 금오산에 지하 터널을 뚫고 처리장을 설치할 경우, 처리장 일대 임야를 고가로 매입할 것이라는 소리도 들렸다.

하민청 등 처리를 반대하는 쪽은 "지역 주민 대다수가 처리장 설치를 결사 반대하고 있다. 3천억 원이 큰 돈처럼 보이지만, 결코 큰 돈이 아니다. 하동군이 한해 농수산물을 팔아 벌어들이는 돈이 1천억 원이다. 처리장이 들어오고 나면, 농수산물 수입이 영원히 없어지고 만다"라고 말한다. 하동지역은 '산에는 차, 강에는 재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처리장이 들어오면 '청정 농수산물'이라는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지난 4월에는 진주 남해 사천 순천 여수 광양 등 시민·환경단체가 하동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 영호남 대책위를 구성했다. 하민청 전 회장 최석봉씨는 "지금 여론조사를 하면, 지역 주민 90% 이상이 처리장 유치에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섬진강에서 도다리를 낚는다?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 논란 말고도 섬진강이 안고 있는 문제는 또 있다. 바닷물이 역류하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상류 지역의 수질 오염이 심각한 것이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바닷물이 역류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상류에 건설된 댐에서 물을 섬진강으로 방류하지 않고, 다른 지역에 공급하기 때문에 수량이 격감한 것이다. 여기에 생활 오폐수가 그대로 방류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무분별한 모래 채취로 인하여 강바닥이 낮아져 바닷물이 역류하는 것이다.

10일 오후, 마침 섬진강에서는 재첩 채취가 한창이었다. 배가 다섯 척 떠 있고, 20 여 명의 '어부'들이 가슴까지 물에 잠긴 채 채첩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오늘은 아홉물. 오후 2시30분에 강에 나와 6시 경,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일을 마친다. 바다에 가까운 섬진강은 밀물썰물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물에 들어가지 않고, 배가 닿는 모래밭에서 재첩을 줍고 있던 서정순씨(49)는 "이맘 때, 4~5월이 재첩이 제일 맛있을 때다. 다른 데서 잡는 재첩은 질긴 반면, 섬진강 재첩은 국물이 뽀얗고 맛이 부드럽다" 라고 말한다. 재첩을 일년 내내 뜨는 것은 아니다. 4월에 시작해 장마철 직전까지만 채취한다.

남편과 함께 재첩을 건져올려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서정순씨는 "재첩은 수심이 깊고 물이 깨끗해야 많이 잡히는데, 요즘은 바닷물이 올라와 많이 잡지 못해 걱정이다"라고 말한다. 보통 하루에 5~6시간 일해서 2말을 잡는데, 값이 좋을 때에는 한 말에 9만 원을 받는다. 하지만 한 달에 일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 비가 오면 쉬어야 하고, 물때도 잘 맞아야 한다.

큰 걱정 : 재첩은 맑고 깊은 물에서 자란다. 바닷물 역류는 재첩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에게 재앙이다.

섬진강 하구에서 재첩 채취를 생계로 삼는 이들에게, 도다리 농어 우럭이 올라오고, 파래가 끼는 바닷물 역류는 재앙이다. 섬진강이 앓으면 섬진강 사람들이 아프다. 섬진강 유역 인간들이 자연을 난개발하면, 섬진강은 바다로 변한다. 강과 산, 그리고 사람은 순환한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이다. 자연이 몸 속으로 들어오고, 인간이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함부로 쏜 화살은 반드시, 함부로 땅에 떨어진다. 한 그릇의 밥에 관하여 명상할 일이다. 한 방울 물을 오래 바라볼 일이다. 공기와 흙에 대하여 숙고할 일이다. 밥 한 그릇에 온 우주가 담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밥은 지금 어떤 밥인가. 그 밥을 먹고 사는 내 몸은 지금 대체 무엇인가. 오염 배출업소인가, 쓰레기 매립지인가, 폐기물 처리장인가, 정화조인가, 자연 정화 기능을 가진 우물가 미나리인가... 짧은 무지개가 떴던 섬진강에서, 윤곽이 부서진 열이레 달이 떠있던 섬진강 둔치에서 몸은 밤새 뒤척인다. 
 

5월10~11일 지리산도보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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