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도보순례 : 제4신] 바람은 나를 깃발로 만들고
  • 이문재 취재부장 (moon@sisapress.com)
  • 승인 200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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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9일, 수요일. 7일째. 27,5 km를 걸어야 한다. 어제 총괄팀장 허욱 국장이 잔뜩 겁을 주었다. 세 시간 동안 오르막이고, 세 시간 동안 내리막 길인 '마의 코스'라는 것이었다. 하동군 옥종면에서 횡천면을 가로질러 하동읍 섬진강가까지 가는 8시간 코스. 전체 구간 가운데 가장 길다.

오전 7시 50분, 옥종면 월횡리 티타늄 광산에서 출발한다. 날씨 맑음. 하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맞바람이다. 선선하다.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브레히트의 시였던가. 이런 내용의 시가 있다. 나뭇가지에 올라가 톱질을 하던 사람이 자기가 자른 나뭇가지와 함께 떨어진다. 다른 나무 위에서 톱질하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비웃는다. 하지만 비웃던 그 사람도 곧 나뭇가지와 함께 곤두박질치고 만다. 나무 줄기 쪽이 아니고, 그 반대 쪽에 앉아 톱질을 한 것이다.

지독한 블랙 유머다. 생명의 위기를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저러하다. 자기가 올라가 있는 나뭇가지를 톱으로 잘라내는 행위가 바로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산업(과학기술) 문명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이 아닐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 시점에서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인문학과 생태학--생태학의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모색>에서 재인용).

걷기야말로 프롬이 말한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다. 걷는 사람들, 느린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 소유욕을 버린 사람들, 그리하여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내가 가장 먼저 만난 '느림의 미학'은 자크 러끌레르크의 <게으름의 찬양>이었다. 벨기에 신부이자 루벵대 교수였던 러끌레르크는, 1930년대에 이미 자동차의 속도를 비판했다. 젊은이들이 자동차의 속도에 매료돼 자전거의 속도를 버리고 있다고 안타까워한 것이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실내이다. 안과 밖이 엄연하게 분리된다. 자동차 안에서 풍경은 스쳐지나가는 대상이다. 자동차 여행은 몸의 여행이 아니라 눈이 하는 관광일 따름이다. 오직 눈으로만 인지하는 자동차 안의 몸은, 자연을 생명으로 느낄 수 없다. 자전거 타기나 걷기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자연을 느낀다. 자연은 스쳐지나가지 않고 몸 속으로 들어온다.

5월, 지리산 남서쪽 사면이 흘려보내는 바람, 섬진강에서 넘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옷과 피부가 아니라 몸 속을 뚫고 나가는 것 같다. 허파나 간, 대장 따위가 바람을 쐬고 있다는 착각까지 든다. 삼림욕이 있으니, 풍욕(風浴)도 있으리라. 행렬은 긴 오르막길에서 풍욕 중이다.

모처럼 공사 현장이 없는 길이다. 15t 덤프 트럭은 여전히 질주하지만, 포크레인은 보이지 않는다. 하동군 청암면을 오르는 2차선 지방도는 산허리의 곡선에 거의 순응하고 있다. 고갯길은 사행천처럼 올라간다.

사행천과 닮아서였을까. 길에서 뱀과 두 번 마주쳤다. 그 징그러운 뱀이 반갑기 그지 없다. 뱀이 있다면 멧돼지도 있을 것이고, 개구리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비는 보기 힘들었다. 중산리에서 한 번, 산청에서 한 번 보았다. 어쩌면 우리 세대가 제비를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백두산 호랑이를 본 마지막 세대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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