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자 박세리'는 안 나올까
  • 기영노(스포츠 평론가) ()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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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기본기 · 체력 부족, 운동 환경 열악해 '고전'…
김성윤·찰리 위, 최경주 능가할 '기대주'
지난해 초,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은 깜짝 발언을 했다. Q스쿨(미국 남자 프로 골프 예선)을 통과한 최경주 선수가 미국 남자 프로 골프(PGA) 대회에서 10위 안에 들면 "주니어 골프 육성기금으로 10억원을 내놓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박장관의 말을 듣고 골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세리·김미현 선수가 미국 여자 프로 골프(LPGA) 대회에서 1년에 두세 차례씩 우승해도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다가, 불쑥 최선수가 10위 안에 들기만 해도 10억원을 내놓겠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박장관이 그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재미 동포로 미국 생활을 오래한 그가 LPGA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PGA 무대에서 한국 남자 선수가 좋은 성적을 올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한국 남자 프로 골퍼들은 여자 프로 골퍼들과 달리 PGA에서 10위 안에 들기도 어려운 것일까? 우선 기본 체력에서 달린다. 최경주 선수는 역도 선수 출신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체력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도 최경주는 PGA에서 경기마다 힘이 부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 바람에 1·2 라운드에서는 상위권에 올랐다가, 3라운드와 4라운드에서 중하위권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8월21일 막을 내린 PGA 챔피언십이었다. 최경주는 이 대회 첫날 공동 선두로 나섰다가, 4언더파 66타로 선두 그랜트 웨이트(64타)에 이어 공동 2위를 차지했다. 2라운드에서 최경주는 2언더파 68타를 쳐 세계적인 선수 데이비드 듀발 등과 함께 공동 5위로 밀렸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톱 10'은 물론 우승도 노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최경주의 한계였다. 최경주는 3라운드에서 2오버파 72타로 20위권 밖으로 밀려나더니, 4라운드에서는 3오버파 73타로 무너져 합계 1언더파 279타로 부진했다. 골프 영웅 타이거 우즈와 공동 29위를 한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힘 좋은 최경주가 이 정도니 다른 한국 선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선수 1명 키우는 데 연간 5천만원 들어


경제적인 열악함도 힘을 빼놓고 있다. 2000년 시즌에 총상금 10위권 안에 들었던 공영진 선수의 한 달 수입은 평균 55만원(세금 공제)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선수는 이에 훨씬 못 미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많은 프로 선수가 레슨 수입에 매달린다. 남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빼앗기다 보면 당연히 자신의 기량을 향상시킬 기회가 줄어든다. 연습 환경도 열악하다. 국내 실내 골프 연습장은 대부분 매트로 되어 있다. 매트 위에서 공을 때리다가 잔디에 나가면 감각이 달라진다. 맨땅에서 축구를 하다가 잔디에서 하면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시아 정상을 벗어나라 : 찰리 위(위 왼쪽)와 김성윤 선수는 골프 교육을 어려서 부터 받은 데다 체력도 튼튼해 미국 PGA에 진출하면 돌풍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남자 선수들은 대개 나이가 들어 골프채를 잡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골프채를 휘두르면, 아이들은 싫증을 내지 않고 쉽게 골프를 배울 수 있다. 이때 골프는 아이에게 운동이 아니라 놀이이다. 무엇보다 재미를 느껴야, 나중에 국가 대표가 되건 프로가 되건 잘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어린이들은 골프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 배우고 있다. 그러니 기량이 향상될 리 없다. 게다가 한국 남자 선수들은 한창 골프 실력이 늘 나이에 군대에 간다. 그나마 야구나 축구 선수는 체육 부대인 상무에 가서 계속 운동할 수 있지만, 골프 선수들은 대부분 일반 사병으로 복무한다.


골프 문화의 차이도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 국내에서는 상류층만 골프를 칠 수 있다. 주니어 선수 한 사람을 키우려면 레슨비·코스비 등을 합쳐 연간 5천만원 정도가 든다. 웬만큼 벌어서는 자식을 골프 선수로 키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좋은 지도자가 부족하다 보니 선수에게 맞는 장·단기 프로그램을 짜기도 쉽지 않다.


김성윤, 고2 때 US아마추어선수권 준우승


그밖에 미국에 진출한 뒤에 부딪히는 언어 소통 문제, 하루빨리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 그리고 한국과 다른 잔디 상태,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 따위가 한국 남자 골퍼들의 집중력과 힘을 빼놓는다.


그러나 한국 남자 선수들의 PGA 적응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일본 선수들이 이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레이트밀워키오픈에서 단신(170cm)인 마루야마 시게키 선수가 첫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마루야마는 아시아권 선수들이 후반 라운드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깨고, 3라운드 4언더파 67타, 4라운드 5언더파 66타를 몰아치며 우승컵에 키스했다.


국내 선수 가운데 PGA에 가장 접근한 선수로는 김성윤(19·고려대 1년)과 찰리 위(29·한국 이름 위창수)가 꼽힌다. 김성윤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99년 US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미국과 한국 골프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지난 8월31일 경기도 일동 레이크골프장에서 벌어진 2001한국프로골프(KPGA) 프로 테스트에서 4라운드 합계 14언더파 274타를 쳐 1위로 통과했다. 김성윤은 부친 김지영 프로 골퍼에게서 철저히 조기 교육을 받아 기본기가 탄탄하다. 기초 체력도 든든한 것으로 알려졌다.


찰리 위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버클리 대학 시절 1995 퍼시픽텐챔피언십, 1996 캘리포니아 아마추어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해 가능성을 보였다. 1997년 아시아 투어에 출전하자마자 콸라룸푸르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아시아권에서 정상을 달리고 있다. 지난해 아시아투어 상금왕에 올랐고, 올해도 5월에 열린 SK텔레콤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해 상금 레이스 선두를 달리고 있다. 김성윤과 찰리 위는 체력, 골프 환경과 문화, 언어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어 PGA Q스쿨만 통과하면 최경주 선수보다 더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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