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 기 죽은 사람들의 '수호 천사'
  • 안은주 기자 (anjoo@e-sisa.co.kr)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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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 부전·암·당뇨병 '해결사'로 각광…
기능성 양잠 제품도 쏟아져
수컷 누에나방을 이용해 만든 천연 강정제 '누에그라'(근화제약)가 최근 '고개 숙인 남성'들을 사로잡고 있다. 누엣 가루가 당뇨병에 좋다는 입 소문을 타고 불티 나게 팔리고 있고, 누에고치를 이용한 비누와 화장품, 뽕잎 가루로 만든 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기능성 양잠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제 '누에=비단'으로 인식되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식·의약품 소재로서 새 기능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혈관을 튼튼히 하고 혈압을 낮추는 아이스크림.


20년 넘게 누에를 연구해 누에그라의 산파역을 했던 농촌진흥청 류강선 박사(83쪽 상자 기사 참조)는 "누에는 먹이에서부터 배설물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 〈동의보감〉을 비롯한 옛 의서들도 '뽕잎·누에 번데기·잠분(똥)이 소갈증(당뇨병)에 효험이 탁월하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누에의 가치는 예전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누에와 뽕잎의 어떤 성분이 그같은 작용을 하는지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농촌진흥청은 비단 원료로서의 양잠산업이 내리막길을 걷던 1980년대 후반부터 누에의 식·의약품 기능에 눈을 돌렸다.




누에 똥에서 항암제를…. 위 오른쪽은 누에 동충하초.


그 결과 경희대와 공동으로 누에 분말의 혈당 강하 작용 원리를 규명하고, 혈당 강하 물질의 하나인 데옥시노지리마이신(DNJ)을 대량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삼성의료원이 약물로서의 효능을 세밀하게 검토 중인 DNJ는 앞으로 5년 후쯤 당뇨병 치료제로 선보일 전망이다.


누에그라는 수컷 누에의 기능을 시험한 1차 무대에 불과하다. 최진호 교수(부경대·생화학)는 "동물 실험에서 누에그라와 비아그라를 각각 주입한 결과, 비아그라를 주입한 동물보다 누에그라를 주입한 실험군에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함량이 30% 가량 더 증가하고, 정자 수가 41% 더 늘어났다"라고 말했다. 수컷 누에나방의 강정 효과는 이미 동물 실험에서 입증된 것이다. 그러나 수컷 누에의 어떤 성분이 어떤 원리로 그런 효과를 발휘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내지 못해, 누에그라는 건강 보조 식품으로 머무르는 데 그쳤다. 성분과 원리를 규명하는 연구가 성공하면 수컷 누에나방은 본격적으로 발기 부전 치료제 시장에까지 진출할 수 있다.




당뇨병에 좋은 누엣가루와 신약 후보 물질.


누에의 먹이인 뽕잎에서는 혈당 강화 효과가 뛰어난 루틴과 가바 성분을 찾아냈다. 루틴은 모세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가바는 혈압을 낮추는 기능을 한다. 또 1997년에는 농촌진흥청이 누에에 동충하초균을 접종하여 대량 재배하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써 동충하초가 널리 이용될 수 있었다.


항암제 폴피린 성분을 많이 가진 잠분 또한 이용 가치가 매우 높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돼지 혈액으로부터 폴피린을 뽑아 항암제로 사용하고 있다. 농촌진흥청과 이원영 교수(연세의대·미생물학)는 잠분으로부터 추출한 폴피린을 이용해 암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이원영 교수는 "잠분의 폴피린은 부작용이 전혀 없고, 원료 추출 비용도 기존 것의 10분의 1밖에 안되어 차세대 항암제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특히 잠분의 폴피린은 정상 세포는 그대로 두고 암세포만 선별적으로 죽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이교수는 밝혔다. 잠분을 이용한 암 치료제는 현재 임상 실험 준비 중이어서 2∼3년 이내에 신약으로 개발될 가능성도 있다.


인터페론 등 추출하는 '생체 공장' 될 수도




치매 치료제와 화장품.


누에고치는 피부 단백질 구조와 유사한 실크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의약품이나 화장품으로 이용될 수 있다. 실크 단백질 가운데 피브로인은 치매 치료제로 연구 중이며, 일본에서는 이미 실크 단백질을 이용한 화장품이 시판되고 있다.




반은 나방, 반은 번데기일 때 만든 '누에그라'(위 오른쪽). 위 가운데는 교배 중인 누에나방.


장기적 관점에서 과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누에의 효용 가치는 생체 공장에 있다. 인터페론과 같은 유용한 물질을 생산하는 데 생체 순환 주기가 매우 짧은 누에 몸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에의 새로운 가치를 활용하는 작업은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다. 누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한국 식·의약 산업이 명암을 달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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