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희망을 향해 달리는 암 환자들
  • 오윤현 기자 (noma@e-sisa.co.kr)
  • 승인 2001.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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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자기 '금물', 증상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달리기 대회 등 '도우미 프로그램' 활용을
지난 9월16일 오후, 5년째 난소암과 싸우고 있는 홍화자씨(50)는 매우 특별한 대회에 참여했다.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테리 팍스 런' 3km 코스에 도전한 것이다. 암환자로서 10분 이상 달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홍씨는 이 날 정상인보다 더 빨리 뛰었다. 홍씨는 "암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힘을 냈다"라고 말했다.


테리 팍스 런은 다른 마라톤 대회와 사뭇 다르다. 승부가 목적이 아니라 암환자였던 한 청년(위 상자 기사 참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열기 때문이다. 매년 세계 50여 나라에서 한날 한시에 열리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한국에서는 1998년 주한 캐나다 상공회의소와 암환자협회 주최로 처음 열렸다. 올해에는 암환자와 정상인을 포함해 모두 8백여 명이 참가했다. 이들이 낸 참가비는 전액 국립암센터에 기부된다.




대회 의미가 남다르다 보니 참가자들의 마음가짐도 각별하다. 두 아들과 함께 10km 코스를 완주한 김성준씨(42·경기도 부천)는 "뛰는 동안 내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암환자들을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암환자들에게 이 대회는 더욱 특별하다. 정상인과 함께 달리며 약해져 가는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력이 소진한 암환자들에게 달리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 날 3km 걷기에 도전했던 김영남씨(49·철학 박사)는 100m도 걷지 못하고 포기했다. "올해 초 폐암으로 한쪽 폐를 제거해 더 걷기 힘들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암환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걷기뿐만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그들의 삶을 힘겹게 만든다.


10년째 폐암을 앓고 있는 김씨는 종종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그럴 때마다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고 울컥 눈물이 솟구친다.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김씨는 활동적으로 일하며 두려움을 잊으려고 애쓴다. 1996년 암환자협회를 만들어 4년 동안 회장을 맡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국민을 상대로 결핵 퇴치 사업을 벌였듯, 암 퇴치 사업을 벌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기금을 마련하고 예방 사업을 벌이다 보면, 조기 진단을 생활화하고, 암환자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직장암을 앓고 있는 암환자협회 김선규 회장(48·의사)은 "암 선고를 받은 날부터 인생이 달라졌다"라고 말했다. 그는 암 선고를 받은 1998년 그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직장암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눈앞이 노랬다. 당장 죽음이 목덜미를 낚아챌 것 같은 공포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를 힘들게 만든 또 다른 요소는 의사의 ‘불친절'이었다. 의사는 암 선고를 내린 뒤 김회장의 참담함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참 안됐소'라는 표정을 보였지만 그때뿐이었다. 죽음의 길로 내몰린 사람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너무나 냉담했다.


8년째 위암과 싸우고 있는 김영일씨(58)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위암이라고 밝힌 의사는 위로 한마디 없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맛있는 것 잘 잡숫고,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라는 말뿐이었다. 모든 의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김씨는 그 순간부터 "의사에 대한 불신감이 깊어졌다"라고 말했다.


국립암센터 윤영호 삶의질향상연구과장은 "의사들의 무덤덤한 태도는 치료 중심의 의료 환경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의사들이 암환자로 하여금 소외감을 덜 갖게 하려면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암환자들은 보통 다섯 시기를 거치는 데, 거기에 맞추어 대화를 해주어야 환자가 두려움을 덜 느낀다는 것이다.




다섯 시기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부정의 시기에는 환자가 의사의 진단이 잘못되었으리라 믿고, 이 병원 저 병원을 헤매고 다닌다. 분노의 시기에는 ‘왜, 하필 내게 이런 병이 생겼나' 하고 끊임없이 자신과 사회에 분노를 표출한다. 타협의 시기에는 ‘내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만 살아보자'라는 식으로 암을 제한적으로 수용한다. 우울의 시기에는 아무 말 없이 슬픔과 침묵 속에 지낸다. 마지막으로 수용의 시기에는 무섭고 두렵지만 암을 받아들인다.


암환자가 어떤 시기에 위치해 있는지 알았다고 해도 대화 방법이 어색하면 암환자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윤과장은 "환자가 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파악하고, 환자가 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싶어하는지 알아낸 뒤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대부분의 환자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의사에게 무한한 섭섭함을 느낀다.


"상담 전화라도 생겼으면…"


의사로부터 일방적으로 선고를 받은 환자는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에 더 시달린다. ‘버려졌다'는 두려움 때문에 매사에 무기력해진다. 걱정이 미래를 결정짓지 않는데도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남은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을 하며 발만 동동 구른다. 더불어 고통도 늘어간다. 그 와중에 ‘위암에 △△이 좋다더라' ‘간암에 ○○○가 특효라더라' 같은 ‘카더라 방송'이 들리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에 돈을 갖다 바친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정신적·경제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다.


김선규 회장은 심적 고통이나 대체 의학에 관한 문제를 의사와 상담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3분 진료가 대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의사지만 3분 진료에 아쉬움이 많다. 암환자는 적어도 30분 이상 진료해야 한다." 그 시간이라야 환자가 정신적 고통까지 호소하고, 정확히 처방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비관적이다. 한국에서 그렇게 하다가는 굶기 딱 좋다는 것이 한 내과 전문의의 말이다.


암환자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자신들을 위한 상담 전화라도 생겼으면 한다. 24시간 암 전문의들이 상주하면서 자신들의 고충과 불만의 소리에 귀기울여 주는 상담소가 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위암 환자 김영일씨는 "암환자들 집에 가면 이 약 저 약이 약국을 차릴 만큼 많다. 남의 말에 솔깃해 닥치는 대로 약을 사 먹기 때문이다. 상담소가 있으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암환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치료할 기관이나 시설이 당장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국립암센터 박재갑 원장은 "암 퇴치 백만인 클럽 등을 통해 암환자들을 돕고 있지만, 아직 정신적인 치료에까지는 신경을 못 쓰고 있다"라고 밝혔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스스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런 노력이 더 큰 기적을 낳기도 한다. 그레그 앤더슨(미국 로버트슐러 연구소 부사장)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취해야 할 50가지 필수 수칙〉(동도원)에서 ‘어떤 의사도 병에 대한 환자의 대응을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의사는 이미 말과 표정으로 사형 선고를 내린다'고 지적했다.


그레그의 주장은 자신이 체험한 ‘기적'에서 우러나왔다. 1984년, 그는 37세에 폐암 선고를 받았다. 당시 의사는 그에게 ‘30일 이상 못 산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보면 의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 있으니 말이다. 그레그는 "한순간 울었고, 다음 순간 병원측 실수에 분노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분노를 딛고 암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은 오로지 살겠다는 의지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어떤 소비자보다 면밀하게 의사에게 물어보라


서울삼성병원 진료부원장 양정현 박사는 암 선고를 받은 뒤 섣부르게 자포자기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일단 2∼3명의 의사에게 확인 진단을 받고, 그 병원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치료법을 선택해 모든 것을 맡겨라." 양박사의 말은 충분히 근거 있는 말이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조기 발견만 하면 완치율이 50%나 된다. 얼마든지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암을 선고받으면 그 어떤 소비자보다 더 면밀하게 자신의 병에 대해 의사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이다. △어떤 종류의 암인가? △어디에서 발생했고, 어디까지 전이되어 있나? △내 병의 치료에 선택할 여지는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을 추천할 수 있는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암 치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단체에 손을 내밀 수도 있다. 서울 원자력병원과 서울간호사회를 통하면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서울대병원의 암환자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암과 관련된 고민을 덜 수 있다(02-760-2790). 암환자협회(02-489-1239)와 암을이기는사람들모임(02-563-1657)을 통하면 울적한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고, 새로운 치료법을 소개받을 수도 있다.


1999년 현재 한국의 암환자 수는 8만5천5백 51명이나 된다(통계청 자료). 집계되지 않은 환자까지 포함하면 1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암으로 인한 사망자도 증가하는 추세다. 1999년 암으로 인한 사망자는 전체 사망자의 21.9%나 된다. 이처럼 암으로 인한 피해는 점점 늘어나는데 암환자를 위한 어떤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테리 팍스 런은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대회이다.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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