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이 된 성의 전사
  • 박인하(만화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
  • 승인 2006.12.0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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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천일야화> 양영순 지음·김영사 펴냄

 
양영순이라는 작가 하면 <누들누드>나 <기동이> <아색기가> 같은, 짧은 페이지에 비수처럼 번득이는 상상력이 충만한 작품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라진 성인만화 잡지 <미스터블루>의 신인 만화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누들누드>는 남근집착형 성적 농담을 담은 판타지였다. <누들누드> 이후에 이야기 만화에 도전하기도 했으나 실패한 후 다시 투항한 것은 스포츠 신문의 4쪽 연재에 맞춰 형식화한 컬러 만화였다. 컬러 만화에서 그의 상상력은 빛났으나,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했다. 작가는 말하고 싶었고, 독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뭔가에 막혀 탈출구를 찾지 못했던 재담꾼 양영순은 호기있게 웹의 문을 열어졎혔다. 중세 아랍문학을 도구로 삼아서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포털 사이트에 <1001>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양영순의 신작은 거대 남근에 대한 집착도, 재기발랄한 성적 농담도, 허를 찌르는 엽기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순수하게 이야기의 힘에 매달렸다. 웹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 세로 스크롤 방식을 도입해 아래로 내리는 칸의 길이와 칸과 칸 사이의 길이를 조정해 감정을 조절해나갔고,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보여준 병렬식 구성을 통해 이야기의 꼬리를 이어 나갔다. 처녀와 결혼해 하루 밤이 지나면 목숨을 빼앗는 샤리아르 왕과, 이야기를 통해 왕의 살육을 막는 지혜로운 언니 세라쟈드와, 함께 궁에 들어간 여동생 두자냐드, 그리고 인간과 교통하는 판타지한 존재 ‘마신’만을 원작에서 빌어와 사랑, 배신, 집착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감성들을 담아냈다. 원작이 보여준 액자 구성식 외화(外話)는 샤리아르 왕의 광기를 지혜로운 세라쟈드가 전해주는 1001일 동안의 이야기로 막았다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양영순은 이를 재해석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고갱이를 보여주는 데 활용한다. 6~15세기에 걸쳐 완성된 <아라비안나이트>와 달리 양영순은 중세 아랍의 특정 시대(짐작컨대 칭기즈칸이 활약한 13세기 무렵)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끌고간다.

그러나 <천일야화>에서 역사적·시대적·공간적 배경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작품 안에서 존재하는 중세 아랍은 하나의 분위기로 숨을 쉬며, 인간과 신이 커뮤니케이션하는 판타지한 배경으로 존재한다. 출판사는 책에서 “중동 신화의 진수를 본다”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는 과장이다. 양영순의 <천일야화>는 알라라는 절대신이 존재하며, 여러 등급의 마신과 마신 사냥꾼과 인간이 공존하는 판타지의 세계다. 그리고 이 만화가 지닌 재미의 핵심도 잘 짜여진 판타지가 주는 맛에서 출발한다. 양영순의 <천일야화>에는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어버린 바그다드의 실존이 아니라 작가가 구축한 판타지의 매혹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무한대로 확장되는(그래서 세로로 길게 스크롤되는) 온라인 지면에서 한정된 오프라인 지면으로 양영순 만화를 옮겨놓은 이 책은 생각만큼 어색하지는 않다. 하지만 칸과 칸이 주는 속도감이나 꽉 짜여진 페이지의 안정감은 일정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는 스크롤 만화가 지닌 필연적 숙명인데 그리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추천인
박석환 (만화 평론가)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
제효원 (독자만화대상 대표)

웹을 통해 잘 알려진 <OLD DOG>(거북이북스 펴냄)와 <26년>(미출간) 등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OLD DOG>는 정우열 작가가 일상에서 잡아낸 작은 웃음들이 신선하고, <26년>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영화화되는 작가 강풀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돋보인다.

만화평론가 박석환씨가 추천한 <불친절한 헤교씨>(작은책방 펴냄), <다세포소녀>(청어람 펴냄), <단구>(학산문화사 펴냄)도 한국 만화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왔는지 전해준다. 박건웅 작가의 <노근리 이야기>(새만화책 펴냄)는, 만화가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매체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여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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