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소방관’을 믿고 또 믿는다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7.2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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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국내 언론 최초 직업 신뢰도 조사 간호사, 환경미화원, 직업운동선수, 의사가 2~5위 33개 직업군 대상…가장 신뢰하지 않는 직업은 ‘정치인’


지금까지 국내에서 직업 선호도 조사는 자주 있었으나 직업 신뢰도를 조사한 적은 없었다. 선호도 조사에서는 소득, 권력, 지위, 고용 안정 같은 사회적 희소가치를 많이 가진 직업군이 주목을 받는다. 그와 달리 신뢰하는 직업군에는 물질적 기준보다 직업 자체가 갖고 있는 봉사, 믿음, 친근감이라는 정서적 가치가 우선시 되는 경향이 있다. 물질적 가치가 생활 안정 같은 이기적 동기에 기여한다면 정서적 가치는 이타적 가치라고 분류할 수 있다.

<시사저널>은 직업이 함유한 이기적 가치보다 이타적 가치에 주목하고 국내 언론 최초로 ‘한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직업은 무엇인가’를 조사했다. <시사저널>은 이를 위해 여론조사 기관인 ㈜밀워드브라운미디어리서치(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천명을 상대로 전화 면접 조사를 실시했다. 전국 16개 광역시도 인구 비례에 따라 추출한 표본 1천명에게 33개 직업군을 예시하고 “개별 직업군을 얼마나 신뢰하십니까”라고 물었다. 33개 직업군은 통계청의 ‘2008년 사업체 고용 동향 조사서’에 나타난 직종 분류를 참조해 선정했다.

■ 모집단 -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 표본 수 - 1,000명
■ 표본 추출 방법 - 비례 할당 및 체계적 추출
■ 표본 오차 - ±3.1%P (95% 신뢰 수준)
■ 조사 방법 - 전화 면접 조사
■ 조사 도구 - 구조화된 질문지
■ 조사 일시 - 2009년 7월21일
■ 조사 기관 - 밀워드브라운미디어리서치

조사 결과 한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직업은 소방관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10명 가운데 아홉 명 이상(92.9%)이 소방관을 매우 신뢰하거나 대체로 신뢰한다고 답했다. 간호사(89.9%)와 환경미화원(89.2), 직업 운동선수(82.1%)와 의사(80.9%)가 그 뒤를 이어 신뢰하는 직업군으로 조사되었다.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직업군은 정치인이었다. 응답자 10명 가운데 아홉 명가량(88.3%)이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조사 결과로 보면 한국인은 생명이나 건강에 기여하는 직업군을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재나 재해 현장에서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이나 질병과 싸우는 의사와 간호사의 모습에서 직업이 내재한 이타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특히 소방관은 위험한 업무 환경에서 남의 생명을 구한다는 직업 속성상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업무 수행 과정에서 봉사나 희생이 필요한 것이지 거짓이나 속임수를 쓸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의료업계 종사자에 대한 신뢰는 국내 의료 체계에 대한 신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윤 동기보다 공공성을 강조하는 국내 의료서비스 체계가 의료업계 종사자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 듯하다.

환경미화원이 신뢰받는 직업군 3위에 오른 것이 눈에 띈다. 소득 수준은 낮으면서도 오물이나 쓰레기를 처리하는 환경미화원에 대해 한국인은 높은 신뢰를 보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운동이라는 속성이 갖는 원시적 순수함 또한 직업 운동선수에 대한 신뢰도를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신뢰를 받는 직업군(6~10위)으로는 한의사, 교사, 은행원, 이·미용사, 프로그래머가 선정되었다. 한의사의 높은 신뢰도는 의사나 간호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가끔 촌지나 교단 폭력 같은 구설에 오르는 것과 달리 교사에 대한 신뢰도는 비교적 높았다. 11위부터 20위 사이에는 신부, 문화예술인, 대학교수, 판사, 전화 안내원·텔레마케터, 운전원, 방송인, 승려, 회계사, 경찰관이 자리했다. 21위부터 33위 하위권에는 검사, 세무사, 공무원, 시민단체 활동가, 목사, 변호사, 기업인, 기자, 연예인, 증권업 종사자가 있었다. 보험업 종사자, 부동산중개업자, 정치인은 각각 31위부터 33위로 최하위를 차지했다.

생명·건강 관련 직업이 상위권에 몰려

정치인이 최하위를 기록한 것은 온갖 비리 사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데다 당리당략에 따라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는 인상이 국민 정서 속에 뿌리 깊이 자리한 탓으로 여겨진다. 정치인과 함께 업종 속성상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하는 검사, 공무원, 시민단체 활동가, 기자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한다는 조사 결과에서 국가 리더십 체계에 대한 불신이 엿보인다. 부동산중개업자, 보험·증권업 종사자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은 것은 고객 이익보다 이윤 동기를 우선한다는 의식이 강한 탓이다. 성직자라는 속성상 높은 도덕 수준이 요구되는 개신교 목사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이 이채롭다. 종파 갈등이나 개인 우상화, 물질 숭배 같이 성직자답지 못한 행태에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교육·소득 수준에 따라 응답 차이 보여

계층별 순위는 전체 순위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성별로 보면 남녀 모두 소방관, 간호사, 환경미화원이 각각 1위부터 3위를 차지해 높은 신뢰도를 보였다. 남성은 직업 운동선수와 이·미용사, 여성은 의사와 한의사에 대한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연령별로는 모든 연령층에서 소방관, 간호사, 환경미화원이 신뢰도가 높았다. 20대에서는 은행원, 40대에서는 천주교 신부에 대한 신뢰도가 다른 연령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반면, 보험업 종사자, 부동산중개업자,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는 모든 연령층에서 전반적으로 낮았다. 20대에서는 전화 안내원·텔레마케터, 60세 이상에서는 시민단체 활동가에 대한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지역별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 서울에서는 프로그래머, 인천·경기와 대구·경북에서는 은행원, 대전·충남·충북에서는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다. 직업별 응답자 사이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농·임·어업에서는 이·미용사와 대학교수, 블루칼라와 학생에서는 은행원, 화이트칼라에서는 초·중·고 교사와 프로그래머에 대한 신뢰도가 다른 직업군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반면 농·임·어업과 자영업에서는 변호사, 학생들 사이에서는 개신교 목사에 대한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교육 수준별로 세분해 보면, 중졸 이하에서는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특히 높았고, 상대적으로 변호사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았다. 대학 재학 이상 계층에서는 프로그래머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으나 기자는 상대적으로 신뢰받지 못했다. 소득별로 보면 100만원 이하 계층에서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고, 세무사의 신뢰도가 다른 소득 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 2백만원 이하 계층에서는 시민단체 활동가에 대한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어디 가도 의사·간호사 ‘추대’ 정치인 못 믿는 건 ‘세계적 현상'

 

다른 나라에서 진행된 직업 신뢰도 조사에서도 국내 조사와 마찬가지로 소방관, 간호사, 의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가 지난 2007년 1월 여론조사 기관 갤럽과 함께 벌인 조사에서, 미국인은 가장 신뢰하는 직업으로 간호사를 꼽았다. 반면, 미국인은 자동차 영업사원을 가장 신뢰도가 낮은 직업으로 꼽았다. 

영국인은 의사를 가장 신뢰하는 직업인으로 뽑았다. 영국 의과대학 ‘로열칼리지오브메디신’이 지난 2월 실시한 ‘어떤 직업인의 말을 가장 신뢰하나’라는 설문조사 결과, 영국 성인 10명 가운데 아홉 명이 의사를 가장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뢰감을 주는 직업 2위는 교사가 차지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지난해 5월 호주의 성인 7백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직업 신뢰도 조사에서 호주인은 구급요원을 가장 신뢰하는 직업군으로 선정했다.

정치인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신뢰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세계 21개국 2만2천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정치인을 신뢰한다고 대답한 참여자는 16%로 가장 낮았다. 영국 로열칼리지오브메디신이 실시한 조사에서도 ‘정치가의 말을 신뢰한다’라는 응답자는 21%에 불과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호주판에서 정치인은 40개 직업 가운데 자동차 세일즈맨, 텔레마케팅 종사자와 함께 동률 38위를 차지해 신뢰도가 성매매자보다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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