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예’들의 제2 동행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0.06.0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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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 좌희정·우광재, 도지사 동반 진출…‘지방 분권’ 이상 실현할 기회 잡아

▲ 2008년 7월11일 김해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서 있는 안희정 충남도지사 당선자. ⓒ연합뉴스

6·2 지방선거를 통해 새로운 차세대 리더들이 다수 탄생했다. 특히 인물난에 시달리던 야권은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시·도의원을 다수 배출함으로써 향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리더들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노무현 사람들’의 부활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수십 명이 공직에 진출했다. 이들 가운데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왼팔과 오른팔로 불리던 안희정 충남도지사 당선자와 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자가 특별히 주목된다. 본격적으로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한 이들은 향후 대권까지 바라볼 만한 정치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참모’ 혹은 ‘측근’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던 안희정과 이광재. 두 사람은 이제 ‘도지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묶였다. 동갑내기 친구인 안희정 충남도지사 당선자와 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 곁에서 보통명사처럼 ‘좌희정·우광재’로 불렸다. 둘은 핵심 측근이었지만, 인생 행로는 빛과 그림자처럼 달랐다.

안당선자의 인생 이력을 살펴보면 무엇이든 좀 빠르게 흡수하는 감이 있다. 남대전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0년, 중앙정보부 대전지부에 끌려가 1박2일 동안 취조를 받았던 것도 그랬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재학 중 두 차례나 구속되면서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가 “결혼하려면 셋방 한 칸이라도 구해야 했으니까”라고 설명한 정치권 투신도 1989년 1월, 26세의 젊은 나이였다. 결혼 역시 같은 해에 했으니 빠른 편이었다.

반면,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시골 소년 이광재가 정치에 꿈을 가진 계기는 ‘책’이었다. 원주중학교를 다닐 무렵 만난 한 친구네 집에 꽂힌 장서를 보며 정치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당선자는 “러시아 피오르드 대제,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정치의 꿈을 키웠다”라고 밝힌 바 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제국의 아침>을 읽으며 정치의 중요성을 느꼈고, 유주현의 대하소설 <광복 20년>을 읽으며 사회의식에 눈 떴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나름의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정치 입문도 같은 해에 한다. 1989년 안당선자는 김영춘 전 의원이 소개해 김덕룡 의원실로 들어갔고, 이당선자는 1987년 경찰 수배를 피해 부산에 내려갔을 때 만난 노무현 의원 곁으로 갔다. 안당선자가 노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은 1990년, 꼬마 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안당선자는 1989년 국회에 들어가 처음 이당선자를 만났는데, 또래에 같은 운동권 출신이라는 동질감이 들어 그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처음부터 노 전 대통령을 모셨던 이당선자와 달리 안당선자가 노 전 대통령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된 때는 1994년이었다. 1992년 총선에서 떨어진 노 전 대통령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차렸고, 이당선자가 권유해 안당선자가 연구소 사무국장으로 들어갔다.

▲ 노무현 의원의 보좌관을 지낼 당시의 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자. ⓒ연합뉴스

동갑내기로 노 전 대통령 밀착 보좌…정치 역정은 대조적

이후 노 전 대통령이 ‘바보’ 같은 도전을 할 때마다 둘의 처지 역시 덩달아 롤러코스터를 탔다. ‘바보 노무현’은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했고, 1996년 총선 때도 종로에서 떨어졌다. 1998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뒤 2000년에는 또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떨어졌다. 이 둘 역시 선거를 치를 때는 모여서 보좌하다 선거가 끝나고 결국 ‘낙선’하면 다시 일자리를 구하러 떠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2001년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할 것을 결심하자 다시 뭉쳤다.

‘좌희정·우광재’는 결국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2002년 ‘바보 노무현’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으로 만들었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할 때만 해도 따르는 현역 의원이 고작 한 명뿐이던 노무현 후보 주변을 젊은 참모들이 채웠다. 안당선자는 정무팀장으로, 이당선자는 기획팀장으로 ‘노풍’을 기획했고 성공시켰다. 이당선자는 주로 아이디어를 내는 역할을 맡았고, 안당선자는 이를 현실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둘은 노무현 당선자가 가장 신뢰하는 참모로 주변에 소개되었고 ‘핵심 측근’ ‘최측근’이라고 불렸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정동채 전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동고동락 동행>에서 이렇게 기억했다. “(노무현) 후보는 안희정·이광재 팀장과의 인연을 아주 소상하게 설명했다. 정치적 동지 관계이며, 수족처럼 아끼노라 했다. (…중략) 안희정 팀장은 캠프 전체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리느라 고생이 아주 많았는데, 이러한 역할 때문에 이후 검찰 수사망에 단골로 엮이게 되는 신산한 고통을 겪게 된다.”

안당선자는 대통령의 측근이라고 불렸지만, 양지에 있지 못했다. 정치 자금과 생계를 위해 개입한 장수천 경영과 관련해 측근 비리에 시달렸고, 노무현 캠프의 금고지기 역할을 담당하면서 수십억 원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혐의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지난 2008년 4월 총선에서는 고향인 충남 논산에서 출마를 희망했지만, 불법 정치 자금 수수가 발목을 잡아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 2009년 9월24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복원식에서 이광재·안희정 당선자가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당선자는 2002년 노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에 임명되었다.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던 2004년 총선에서 고향인 강원도 태백·영월·평창·정선 지역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를 시작했다. 전통적인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지역구에서 이당선자는 2008년 재선에 성공하며 정치적 힘을 증명했다. 한나라당이 압승한 18대 총선에서 이당선자의 지역구 유권자들은 50%가 넘는 지지를 보냈다. 이당선자가 재선에 무난하게 성공한 이유에 대해 지역 정가에서는 “이당선자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좌희정·우광재’는 40대 당선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안당선자는 삼남매 모두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애쓴 부모님의 혜택을 받았고, 이당선자는 원주중학교에 갈 수 있도록 장독대에 정화수를 뜨고 간절히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의 은덕을 입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부모님들이 자기 것을 모두 내던져서 대학 교육을 시킨 최초의 세대’(안당선자의 말)에게 가지는 유권자의 기대감 때문에 선택받았다는 점도 같다. 16년 전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노 전 대통령과 머리를 맞대고 지방 분권을 연구하던 두 사람은 이제 현실에서 그것을 실현시킬 기회를 막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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