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인권유린 블랙리스트 오른 ‘백두공주’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18 15:10
  • 호수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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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美 북한 인권 보고서에 명시 “실질적 제재 효과는 없을 듯”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33)의 여동생 김여정(28)은 ‘백두공주’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진 김씨 일가의 3대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 당국이 ‘백두산 혁명 정기를 타고난 혈통’이라고 선전한 데 따른 것이다. 오빠 김정은의 든든한 후광을 바탕으로 이른바 평양 로열패밀리의 핵심 역할을 하는 여성이란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김여정이 북한 인권유린과 주민억압의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미 국무부가 1월11일 의회에 제출한 북한 인권유린 실태에 관한 2차 보고서에서다. 김여정은 김원홍 국가안전보위상, 최휘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민병철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조용원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일남 함경남도 보위국장, 강필훈 인민내무군 정치국장과 함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국가계획위원회와 노동성 등 기관 2곳도 포함됐다.

 

당초 김여정은 리스트에서 제외된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발표를 앞둔 막판에 미 최상층부 결단으로 제재 대상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김여정의 혐의는 예상보다 심각하다. 함께 제재 목록에 오른 인물들이 북한 공안기관인 국가안전보위성 최고책임자 김원홍 등이란 점에서도 이는 감지된다. 고문이나 정치범 수용소 운용 같은 중범죄 혐의의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김여정이 북한 권력 내에서 뭔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미 국무부는 보고서에서 김여정을 북한의 언론검열과 주민 세뇌공작의 최고책임자로 지목했다.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와 관련해 보고서는 “북한 내 모든 미디어를 관장하며, 특히 검열을 핵심 업무로 하면서 억압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주민을 세뇌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여정은 선전선동부의 부부장을 맡고 있다. 국무부는 “부부장인 김여정이 선전선동부 업무를 매일같이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2016년 5월10일 주석단에서 김정은의 꽃다발을 직접 챙겨주는 김여정(붉은 원) © 조선중앙통신 연합

“‘여정 동지’ 통하지 않고 되는 일 없다”

 

선전선동부는 북한 체제의 대내외 홍보를 맡고 있는 부서라 볼 수 있다. 김정은의 공개 활동이 조선중앙TV나 노동신문을 통해 어떻게 보도되는지 등을 관장하는 것이다. 신문·방송에 나갈 사진이나 영상을 꼼꼼히 체크하고 상징조작을 어떻게 할지를 담당한다. 또 이에 반하는 사소한 움직임도 색출해 가차 없이 응징하는 임무도 맡고 있다. 김여정이 바로 이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는 게 미 행정부의 판단이다. 오랜 기간 해당 업무를 맡아 ‘북한의 괴벨스’(독일 나치정권의 선전 책임자)로 불리는 김기남 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김여정의 힘에 눌려 상징적 지위에 머물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김여정은 김정은 체제 들어 평양에서 제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인물로 통한다. 오빠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거의 유일한 존재란 얘기다. 처형과 해임·강등 같은 공포정치로 전전긍긍하는 다른 간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2011년 12월 김정일 장례식 때 김정은과 모든 간부들이 꼿꼿하게 부동자세를 한 자리에서도 김여정은 행사장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김여정을 두고 북한 권력층 사이에서는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거나 “여정 동지를 통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인사나 이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김정은의 형 김정철(36)의 행보와 차이가 난다. 동생과의 후계경쟁에서 밀린 김정철은 2015년 영국 출신 뮤지션인 에릭 클랩튼의 70세 기념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런던을 찾았다가 서방 언론에 노출됐다. 김정철은 2011년 2월에도 여성을 동반해 싱가포르 공연에 참석하는 등 권력과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백두공주’ 김여정이 권력 전면에 공식적으로 나선 건 2014년 3월이다. 당시 그는 김정은을 수행해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에 해당) 대의원 투표장에 나왔고, 투표함에 표결하는 장면이 관영매체를 통해 공개됐다. ‘당 책임일꾼’으로만 불렸던 김여정은 그해 11월 노동당 부부장으로 호칭되기 시작했다. 김여정은 북한 정권 사상 최연소 노동당 부부장이다. 김정일의 경우 28세인 1970년에 선동부 부부장이 됐고, 고모 김경희는 30세에 국제부 부부장에 올랐다. 우리 대북 정보 당국은 김여정이 한때 ‘김예정’이란 가명으로 활동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014년 11월27일 김여정이 북한 최고 실세로 떠올랐음을 보도하는 국내 뉴스의 한 장면 © AP 연합

2016년 하반기부터 활동 뜸해져

 

김여정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이 뜸하다. 통일부 집계에 따르면, 김여정은 지난 한 해 9차례의 공개 활동을 하는 데 그쳤다. 이전까지 오빠를 밀착수행하며 북한 권력 내에서 최고의 핵심 실세 중 하나임을 과시하던 모습에서 활동을 자제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를 두고 20대에 불과한 김여정이 부부장급 직함으로 활발히 활동하자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쏟아졌기 때문이란 진단이 나온다. 북한 노동당의 부부장급은 60~7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지난해 김정은의 동선이 핵·미사일 도발이나 군부대 방문 등에 치중됐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이런 자리에 김여정을 동행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의 공개 활동도 4차례에 불과했다는 점도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대남 도발을 위협하고 핵 불바다 등을 언급하는 자리에 여성을 동반하는 게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고, 김여정·리설주의 이미지에도 손상이 갈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른 김여정은 미국 입국 금지와 더불어 미국 내 자금 동결 및 거래 중단 등의 대상이 된다. 물론 김여정이 미국을 방문하거나 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제재 효과는 없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제재망이 김정은을 포함한 북한 권력의 핵심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 압박감이 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인권유린의 주범 격으로 지목된 김여정의 경우 국제사회의 비난은 물론 북한 주민들 사이에 입소문이 번지면서 거부감이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북한 체제에 변고가 생길 경우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부담감도 김여정을 계속 억누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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