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거울 獨언론 ‘슈피겔’, 깨지다
  • 강성운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10 08:00
  • 호수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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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상 휩쓴 특종기자의 ‘가짜뉴스들’로 신뢰도 추락

독일 베를린에서 프리랜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후안 모레노는 2018년 시사주간지 ‘슈피겔’로부터 기사 의뢰를 받았다.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대에서 암약 중인 민병대에 관한 기사를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모레노는 난생처음으로 프리랜서의 밥줄을 쥔 ‘갑’의 의뢰를 거절했다. 슈피겔 소속 기자인 클라스 렐로티우스와 함께 기사를 작성하라는 조건이 붙었기 때문이다.

렐로티우스는 독일 저널리즘의 새로운 스타였다. 그는 석사 과정을 밟던 2011년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유력 매체에 기사를 발표했다. 그는 기자가 된 후 거의 매년 상을 받았다. 기자생활 2년 만에 독일어권 3국(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신진 언론인상을 모두 받았고, 2014년에는 스물아홉의 나이로 CNN이 선정하는 올해의 기자에 뽑혔다. 

렐로티우스의 글은 특별했다. 그는 미국의 대(對)멕시코 폐쇄 정책, 무장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의 자살폭탄 테러, 시리아 내전 등 심각한 국제정치 문제의 여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의 글에는 상투적인 육하원칙의 틀 밖에서 건져낸 생생한 디테일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그는 미국의 사형집행 참관인인 게일 글래디스를 동행 취재한 르포 기사를 그녀의 집 현관문에 대한 묘사로 시작했다. 독자들은 그녀가 버스를 탈 때 “멀미가 심해 늘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고, 버스에서는 꼭 쥔 두 주먹에 손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는 묘사를 통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여성의 심리와 일상을 눈앞에서 보는 듯 상상할 수 있게 했다. 그를 2018년 독일 리포터상 수상자로 선정한 심사위원단은 렐로티우스의 글이 “유례없는 가벼움과 밀도, 그리고 결코 문제의식의 출처를 밝히는 법 없는 시의성” 덕에 두각을 나타낸다고 칭찬했다. 게다가 렐로티우스는 평소 주변에 늘 친절하고, 숫기가 없다 싶을 정도로 겸손해 동료들의 호감을 사곤 했다.

독일의 유력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클라스 렐로티우스 기자가 작성한 미국-멕시코 접경지대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최근 이 기사를 포함해 그가 지난 7년간 슈피겔에서 작성한 기사 10여 편이 거짓 날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 EPA 연합
독일의 유력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클라스 렐로티우스 기자가 작성한 미국-멕시코 접경지대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최근 이 기사를 포함해 그가 지난 7년간 슈피겔에서 작성한 기사 10여 편이 거짓 날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 EPA 연합

공동 취재로 들통난 사기 행각

모레노는 렐로티우스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오래전 렐로티우스의 기사에서 본 미심쩍은 구절이 기억났다. 쿠바 최초의 세무사 사무실 앞에 구두 닦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저소득 일용직 노동자들이 세금 신고 때문에 돈을 주고 세무사를 고용한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도 그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기억이 불러온 ‘이상한 의심’과, 혼자서도 취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더해져 모레노는 그와의 공동 취재를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기사는 자신이 멕시코 현지에서 난민들을 맡고, 렐로티우스가 애리조나주의 민병대를 맡아 각각 해당 부분을 쓰는 것으로 결정됐다.

2018년 11월 슈피겔에 실린 ‘예거의 한계’라는 기사는 그렇게 완성됐다. 기사를 읽던 모레노는 렐로티우스가 쓴 부분에서 이상한 부분을 여럿 발견했다. 텍사스주(州) 브라운스빌의 민병대가 산악지대에서 멕시코인들을 생포한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모레노는 그 지역이 ‘팬케이크처럼 납작한 평지’임을 알고 있었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봤던 인물들과 다른 이름들이 기사에 실려 있기도 했다. 모두 렐로티우스가 취재한 부분에서다. 모레노는 슈피겔 편집부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오히려 “렐로티우스가 그럴 리 없다”는 반응만 얻었다. 모레노는 자비를 들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렐로티우스가 취재원으로 언급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스타 저널리스트의 사기극이 드디어 탄로 나는 순간이었다.

클라스 렐로티우스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주간지인 슈피겔과 뉴스 사이트 ‘슈피겔 온라인’을 통해 약 60여 편의 기사를 냈다. 그는 이 중 14편의 기사가 허위 사실에 기반하거나 통째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자백했다. 슈피겔사(社)는 현재 렐로티우스가 쓴 모든 기사가 거짓이라고 전제하고 진위 여부를 재확인 중이다. 렐로티우스는 슈피겔 외에도 여러 유력 매체에 글을 실었다. 지금까지 타 매체에 낸 기사 중 ‘가짜뉴스’로 확인된 것만 10여 편에 이른다. 한 사기꾼이 독일어권 언론 전체에 신뢰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문제는 ‘슈피겔 스타일’에 있다?

슈피겔은 2018년 12월19일 렐로티우스의 자백을 바탕으로 허위 보도 사실과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 정황, 조작 과정과 사례들을 공개했다. 후속 보도와 문제 처리 상황은 슈피겔 온라인 첫 화면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중이다. 

슈피겔은 렐로티우스 사건을 분석한 기사에서 “당사에서 발표되는 모든 기사는 각 부장과 편집장, 교열실, 법률팀의 검토를 거치며 물리학자, 역사학자, 생물학자, 또는 이슬람 학자 등 60여 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문헌실이 기사 속 이름과 날짜, 사실관계를 확인한다”고 밝혔다. 슈피겔사는 “가짜뉴스의 시대에 슈피겔은 기꺼이 문헌실 규모를 늘렸다”고도 주장했다.

이 같은 철저한 검증 시스템도 놓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기자 본인이 아니고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디테일들이다. 그는 평소 문헌실에 기꺼이 도움을 요청하는 등 완벽주의자로 행세해 문헌실과 동료 기자들의 전적인 신뢰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증빙자료 제출이 요구될 경우 그는 가짜 이메일을 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기사에 인용된 대화가 이뤄졌음을 증명할 수 있는 실제 이메일이나 메신저 대화 등을 제출하지 않고 인상적인 글들을 써낼 수 있었다. 

한편 일각에선 단편소설에서와 같이 인물을 중심에 두고 긴장감 넘치는 글을 지향하는 이른바 ‘슈피겔 스타일’이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의 위르겐 카우베 공동 발행인은 슈피겔 기자들이 “주장, 아이디어, 이해관계가 아니라 이런 것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살며 어디서 그들을 만났는지에 대해 쓴다”고 비판했다. 경제전문지 한델스블라트의 게오르크 알트로게는 이러한 문화가 “가짜 리포터를 배양하는 토대가 됐다”고 꼬집었다. 전직 슈피겔 기자인 유명 언론인 슈테판 니게마이어 역시 슈피겔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위험한 문화가 있다”고 비판했다.

슈피겔사는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최소 6개월간 기사 제작 과정을 감사하며 그 과정을 전부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렐로티우스가 쓴 기사들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거짓 뉴스’라는 경고문과 함께 제공된다. 렐로티우스를 슈피겔에 추천한 울리히 피히트너 편집장과 렐로티우스가 소속된 사회부의 마티아스 가이어 부장은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조치들이 새로운 시스템은 물론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낼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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