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들
  • 강헌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2 14:00
  • 호수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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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그리고 정태춘의 《5·18》

1980년 5월18일. 그해 나는 재수생이었다. 서울역 근처에 있던 이른바 명문 학원에 등록했다. 3월 대학이 개학하면서부터 연일 서울역 광장에서 신군부 반대 시위가 벌어져 암울한 청년들이 아침부터 빼곡히 앉아 있는 학원 교실 안으로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고3이던 직전 해 부산에서 나는 부마항쟁을 경험했기에 별다른 충격은 없었지만, 재수생이라는 신분으로 검문당하는 것은 정말 재미없었다. 낯선 서울 생활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혼란을 핑계로 4월말 그냥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5월이 됐다. 무료한 재수 생활을 부산에서 보내던 중 신문과 방송에서 ‘광주’를 연일 보도하기 시작했다. ‘광주 사태’는 부산의 재수생에게 마치 딴 나라에서 일어난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려왔다. 바로 8개월 전에 부마항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꼈음에도 말이다. ‘폭도’ ‘간첩’ ‘북괴’ ‘공작’ 등 듣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던 단어, 단어들.

가수 정태춘 ⓒ 연합뉴스
가수 정태춘 ⓒ 연합뉴스

 

부산과 광주의 역사적 진실

내 세대는 ‘텔레비’에서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라고 믿고 자란 세대다. 신문에 박힌 글자는 정의의 언어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펜’의 힘을 동경한 세대다. 그러니 경상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 북한만큼이나 심리적 거리가 먼 전라도 어디에서 ‘폭동’이 일어났단 말을 곧이들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의 부속고등학교였기 때문에 1979년 10월19일 아침 등굣길에 드넓은 부산대학교 운동장에 밤새 진주한 계엄군을 보았더랬다. 그 전날 밤 도심으로 진출한 5만 명이 넘는 시위대들은 열한 곳의 경찰서를 습격했고 세 곳의 방송사에 불을 질렀으며 세무서 또한 온전하지 못했다. 한발 늦게 도착한 계엄군들이 분풀이로 길가에 청년들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불심검문과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를 서슴지 않는 풍경을 지켜봤다. 검은 고등학교 교복이 우리를 지켜줬을 뿐이다.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민 시위대들이 하루만 더 한 발짝 더 나아갔더라면 7개월 뒤에 광주에서 일어날 발포가 부산에서 먼저 일어났을 것이다. 나중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사태가 더 심각해지면 자신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했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처럼 200만~300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질 것이라고 한술 더 떴다.

그리고 부산에서 발포 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현장을 급히 방문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일선 계엄군과 군사령부에 “절대로 발포하지 말라”고 단단히 단속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일주일여 뒤 김재규는 궁정동의 안가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쏜다.
부마항쟁마저도 북괴 공작원의 조종으로 인한 내란 사태라고 주장하는 ‘가짜뉴스’도 SNS상에 가끔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39년이나 지난 지금 광주를 당시의 언론 보도 프레임대로 ‘북괴 공작원의 지령’ 운운하는 극우 세력의 주장은 인간에 대한 이성을 상실한 모독이고, 우리 속의 한 지역에 대한 더러운 차별이며, 나아가 인류 정의에 대한 훼손 행위다.

이 주장을 믿는 그대의 출생적 뿌리가 혹시라도 TK(대구·경북) 지역이라면 해방 후 최초의 대규모 시민항쟁이 1946년 가을 대구와 경북 다수의 지역에서 일어났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대들이 신처럼 떠받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형 박상희가 그 항쟁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미군과 친일 경찰의 총에 사살됐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남로당계 좌익이 주도했다고 쉬쉬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10월 봉기의 근원적인 동기는 식량공급 악화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악질적인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고용한 미군정의 정책 실패로부터 찾아야 한다. ‘폭도’가 된 시민 대부분은 평범한 중간 계급이었다. 

2월2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5·18 학살·역사 왜곡 처벌법 제정, 자유한국당 규탄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광화문 방향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월2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5·18 학살·역사 왜곡 처벌법 제정, 자유한국당 규탄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광화문 방향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피 토하는 심정으로 ‘광주’ 알린 정태춘

대구 인민항쟁은 작곡가 김순남으로 하여금 《인민항쟁가》를 낳게 했고 광주 민주화운동은 김종률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의 영감을 선사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너무 압도적인 울림을 가진 탓인지, ‘광주’를 담은 노래는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못했다. 아직도 불리는 노래는 정세현의 《광주출전가》 정도가 고작이다.

광주의 기억이 점차 저물어가던 1997년 한국 포크음악의 거목 정태춘은 많은 예술가들이 정면으로 바라보기를 두려워했던 5·18의 역사적 쟁점을 장엄한 선율과 피를 토하는 심정의 감성으로 풀어놓았다. 당시 이 노래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를 넘은 명곡이 된 이 노래가 탄생한 배경이 된 작품이 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에 열린 1회 광주 비엔날레의 대상작이 그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쿠바 작가 크초의 《잊어버리기 위하여》였다. 정태춘은 《잊지 않기 위하여》 이 노래를 만들었다. 잊어도 좋으니 제발 훼손만이라도 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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