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피해 비행기 탄 회장님들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19.07.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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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터지면 휠체어 타거나, 해외로 도망가거나

비리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된 재벌 총수 일가의 행동 패턴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휠체어에 타는 것이다. 건강상 이유를 내세워 국민과 재판부로부터 동정표를 얻기 위함이다. 이른바 재벌 총수의 ‘휠체어 쇼’는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첫선을 보인 후 사법기관에 출두하는 재벌의 상징이 됐다.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들 대부분은 적어도 한 번씩은 휠체어를 타고 대중들 앞에 섰다. 이를 두고 영국 경제지인 파이낸셜타임스는 2007년 ‘한국 재벌 총수들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휠체어를 탄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휠체어 쇼’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한국 재벌만의 고유한 문화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 다른 패턴은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이다. 수사를 회피하기 위한 해외 도피다. 영화 《베테랑》에도 이런 모습이 담겼다. 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한 재벌 3세가 연예계, 정·재계 인사 자녀들과 마약 파티를 벌인 사실이 적발될 위기에 놓이자 해외 도피를 모의한 것이다. 영화에서 재벌 3세의 해외 도피는 집념 어린 경찰의 수사로 좌절됐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그동안 재벌가 인물들이 수사망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일은 빈번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4남 정한근씨가 21년 해외 도피 끝에 체포됐다. ⓒ 시사저널 박은숙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4남 정한근씨가 21년 해외 도피 끝에 체포됐다. ⓒ 시사저널 박은숙

끊이지 않는 총수 일가의 해외 도피

21년의 도피생활 끝에 최근 검거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4남 정한근씨가 그런 경우다. 정씨는 수백억원대 회삿돈을 스위스의 비밀계좌를 통해 빼돌린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1998년 해외로 도피했다. 이후 그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으면서 수사는 무기한 연기됐다. 수사가 재개된 것은 2017년 정씨가 미국에 체류 중이라는 측근의 인터뷰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다. 이를 계기로 검찰은 본격적인 정씨 소재 추적에 나섰다. 미국 수사 당국과 공조한 결과, 정씨가 2017년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에콰도르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하고 정씨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정시는 국내로 압송돼 조사를 받고 있다.

주가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범LG가(家) 3세 구본현씨는 해외 도피로 인터폴 적색수배가 내려진 상태다. 그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코스닥 상장 통신 단말기 제조업체와 게임 개발업체를 무자본 인수한 뒤 허위 공시 등을 통해 수백억원대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구씨는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해 10월 네덜란드로 출국한 뒤 종적을 감췄다. 이로 인해 구씨는 현재 기소가 중지됐고, 경찰은 그의 여권을 취소하는 한편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요청했다. 구씨가 해외로 도피한 이유는 가중처벌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앞서 2012년에도 대법원에서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김준기 전 동부그룹 회장도 미국에서 2년 가까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김 전 회장은 2017년 비서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했다. 그러나 수사는 진행되지 못했다. 질병 치료를 명목으로 미국으로 출국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외교부는 여권을 무효화했지만 김 전 회장은 귀국과 출두를 계속 거부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올해 5월 김 전 회장의 성추행 사건을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현대가 3세인 정현선 현대기술투자 상무는 한때 해외 도피 의혹을 받았지만 지금은 귀국해 조사를 받고 있다. 변종 마약 구매·흡입 혐의를 받고 있는 정 상무는 마약공급책이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인 올해 2월20일 영국으로 출국한 뒤 줄곧 해외에 머물렀다. 경찰이 4월초 정씨에게 출석 요구서를 전달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도피성 외유 의혹이 불거졌고, 경찰은 여권 말소 등 강경 대응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자 정씨는 경찰에 귀국 의사를 전달했고, 4월21일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인천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에 체포됐다.

법조계에서는 재벌가의 일시적 해외 도피를 수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 수사에 대비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구축하거나 피해자나 증인, 참고인 등을 회유할 수도 있다. 또 사건을 둘러싼 여론이 잠잠해지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일시적으로 해외로 피신한 이들은 언젠간 국내로 돌아와 재판장에 서야 한다. 반면, 작정하고 영구적 해외 도피에 나선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신분을 위장하면 행적을 추적하기 쉽지 않은 데다, 재벌의 경우 오랜 도피생활을 지속할 자금력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상기 언급한 정한근씨가 21년 동안 도피생활을 계속할 수 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전윤수 전 성원건설 회장도 비슷한 경우다. 임금 체불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던 전 회장은 수백억원대 회사자금을 들고 출국해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또 비자금 조성과 횡령 등의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를 위기에 처하자 2005년 해외로 도피한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도 2015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캄보디아 등지에서 이름을 바꾸고 숨어 지냈다.

사정 당국에 따르면 밀항 등을 통해 출국기록을 남기지 않고 해외로 나간 경우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국내에 체류하는 것으로 간주돼 공소시효 정지 제도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소시효 기간만 버티면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에 대응하는 사정 당국의 수사 집념도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주가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LG가 3세 구본현씨는 해외 도피로 인터폴 적색수배가 내려졌다. ⓒ LG 제공
주가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LG가 3세 구본현씨는 해외 도피로 인터폴 적색수배가 내려졌다. ⓒ LG 제공

집요해진 사정 당국 해외 도피자 수사

실제 검찰은 정한근씨가 출국기록을 남기지 않고 해외로 나간 탓에 공소시효가 임박해 오자 그의 신병을 확보하지 않았음에도 기소했다.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 정씨의 에콰도르 거주 사실을 파악하고 범죄인 인도를 요구했지만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우회적인 방법을 동원키도 했다. 에콰도르 내무부에 정씨의 강제 추방을 요청한 것이다. 이후 에콰도르 내무부는 정씨를 강제 추방하고, 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최종 목적지로 삼아 파나마로 출국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한국 검찰에 통보했다.

이에 검찰은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과의 공조를 통해 파나마 이민청이 정씨를 구금토록 해 신병확보에 성공했다. 이와 관련해 한 사정 당국 관계자는 “해외 도피자 신병확보는 물론 도피에 성공해도 숨을 곳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계속해서 세계 주요 국가들과의 사법공조를 늘려오고 있다”며 “문무일 검찰총장이 올해 4월말 중앙아시아·중남미 등을 방문한 것도 사법공조를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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