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김 세진 행동주의 펀드에 재계 ‘벌벌’ 떤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19.12.04 10:00
  • 호수 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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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칼 이어 대림·태영건설·에스엠 등도 사정권
내년 3월 주총에서 대립 구도 본격화 전망

1999년 4월,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타이거펀드는 SK텔레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사외이사 제도 도입과 주식 액면분할, 경영진 퇴진 등을 회사 측에 요구한 것이다. 계열사 간 부당한 거래로 인한 경쟁력 약화가 표면적 이유였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당시 SK그룹이 보유한 SK텔레콤 지분은 21%에 불과했다. 2대 주주는 KT(19%)로, 외국계 펀드와 연합군을 결성할 경우 적대적 M&A(인수합병)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SK그룹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해 6월 경영권 방어와 시설투자를 겸한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 타이거펀드는 소송으로 맞섰다. 표 대결 끝에 적대적 M&A는 막았지만, SK그룹은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6000억원을 지원한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은 경영 상황이 크게 악화되면서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지주회사 격인 SK도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1조3000억원을 투입한 SK텔레콤의 주식 가치 하락과 함께 자회사인 SK글로벌의 주가 하락으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됐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내 기업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연합뉴스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행동주의 펀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내 기업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연합뉴스

1년 만에 6000억원 시세차익 내고 ‘먹튀’

반대로 타이거펀드는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사측의 유상증자에 반대하던 타이거펀드는 SK텔레콤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SK그룹 계열사들이 이 지분을 매입하면서 타이거펀드는 1년여 만에 6000억원이 넘는 돈을 손에 쥐게 됐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대주주 지분이 취약한 기업은 언제든 적대적 M&A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SK그룹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2조원이 넘는 자금을 계열사를 통해 투입하면서 재무구조가 동반 악화됐다. 결과적으로 SK그룹이 2003년 소버린의 적대적 M&A에 노출되면서 그룹 와해 위기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타이거펀드 먹튀’ 사건이 발생하고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삼성과 현대차그룹 등 재벌기업부터 광주신세계, 컴투스, 골프존 등 유통 및 IT업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내 기업들이 이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됐다. 2세 승계 문제나 지배구조 개편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세칭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행동주의 펀드가 개입했다.

그럴 때마다 회사 주가는 요동을 쳤다. 이들 행동주의 펀드가 비정상적인 지배구조와 경영 개혁에 힘을 보태 주주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주가가 오르면 빠르게 지분을 처분하고 빠져나가면서 국부 유출 논란도 적지 않았다.

자료: 한국경제연구원
자료: 한국경제연구원

토종 행동주의 펀드 영향력 세졌다

2003년 SK그룹을 해체 위기까지 몰고 간 소버린자산운용이 대표적이다. 소버린은 2003년 3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총수인 최태원 회장의 구속으로 주가가 폭락하자 자회사인 크레스트증권을 통해 지주회사 격인 SK 지분을 사 모았다. 불과 20여 일 만에 14.99%의 지분을 확보한 소버린은 현 경영진 퇴진과 부실 계열사 지원 반대를 요구했다. 하지만 주가가 오르자 소버린은 빠르게 주식을 처분해 9000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챙겼다. 세계적인 기업 사냥꾼인 미국계 자본 칼아이칸도 2006년 경영 참여를 전제로 KT&G 지분을 공개 매수한 후 주가가 오르자 매각해 1500억원대 수익을 챙겼다.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2015년 6월 삼성물산 지분 7.12%를 확보하고 3대 주주에 올랐다. 이후 3세 승계 구도의 핵심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반대를 집요하게 외쳤다. 합병의 불공성과 불법성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기본이다. 합병에 반대하는 국내외 세력을 끌어모은 후 삼성그룹 측과 힘 대결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주주들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고, 엘리엇은 오른 주식을 매각하고 빠져나가면서 뒷말이 나왔다. 이들 행동주의 펀드가 겉으로는 기업의 병을 치료하는 해결사를 자처하지만, 실상은 시세차익을 노린 기업 사냥꾼이 아니냐는 것이다.

눈에 띄는 사실은 한국형 행동주의 펀드들의 입김도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행동주의 펀드들이 연합해 사단법인 형태의 기업거버넌스협회 설립을 준비 중이라는 얘기까지 들려올 정도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재계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이 잦아지고 있다.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은 2017년 소액주주들과 연대해 KISCO홀딩스를 압박했다. 현대홈쇼핑은 올해 3월 달튼인베스트먼트와 VIP자산운용 연대로부터 합동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단법인 형태의 커버넌스협회가 설립될 경우 재계에 대한 공격이 더욱 거세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명 ‘강성부 펀드’로 알려진 KCGI의 활동이 우선 눈에 띈다. KCGI는 현재 자회사인 그레이스홀딩스를 통해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 지분 15.98%를 보유하고 있다. 2018년 11월 8%대 지분 보유 사실을 밝히며 경영 참여를 선언한 지 1년여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KCGI의 지분율이 향후 20% 수준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 지분을 바탕으로 KCGI는 한진그룹 오너 일가를 정조준했다. 지난 1월 주주명부열람등사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후 故(고)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에 대한 퇴직금 등 급여 지급 문제와 2세인 조원태 회장의 선임 과정 등에 대한 검사인 선임을 신청했다.

한진그룹은 그동안 KCGI의 요구를 거절해 왔다. 하지만 최근 법원이 검사인 선임 신청 일부를 인용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법원 결정으로 조 전 회장에게 지급한 퇴직금 등 민감한 내용을 KCGI 측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내년 3월 주총에서는 이 문제로 인한 양측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진그룹이 최근 사업구조조정을 예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원태 회장은 11월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특파원단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KCGI는 수만 명의 주주들 중 일부다. 따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이익이 남지 않는 사업은 정리하고, 대한항공을 주축으로 한 항공운송사업과 항공기 제작, 호텔·여행 등 지원사업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내년 주총에서 예정돼 있는 KCGI와의 표 대결을 의식한 전략적 행보로 재계에서는 보고 있다.

KCGI는 대림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대림코퍼레이션 지분 32.65%도 보유하고 있다.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이 2016년 공익재단법인인 통일과나눔에 기부했던 것이다. 통일재단은 최근 이 지분을 처분했고, KCGI가 공개입찰을 통해 지분을 매입하면서 2대 주주에 올라 주목되고 있다.

대림그룹 측은 “아직까지 KCGI 측으로부터 어떤 요구도 받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경영진이 현재 50%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KCGI의 지분이 과반이 되지 않은 만큼 경영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며 “주요 의사 결정에 반대표만 행사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진칼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도 우선적으로 KCGI가 향후 대림그룹을 상대로 배당 확대 등의 요구를 할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양측의 충돌이 주력 계열사인 대림산업으로 불똥이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신진영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여러 가지 요건 중 총수 지분율이 낮고 개선사항이 있는 기업의 경우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며 “대림산업과 태영건설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 압박을 받는 경우 경영권 유지를 위한 사전 방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5년 엘리엇 매니지먼트와의 표 대결에서 승리한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 연합뉴스
2015년 엘리엇 매니지먼트와의 표 대결에서 승리한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 연합뉴스

행동주의 펀드 공격 후 실적 내리막길

실제로 머스트자산운용은 최근 장내매수를 통해 태영건설 지분을 12.12%에서 15.22%로 크게 늘렸다. 윤석민 태영건설 회장(27.1%)에 이은 2대 주주가 된 것이다. 보유 목적도 ‘단순투자’에서 ‘경영참가’로 변경 공시했다. “현재 9730억원인 태영건설의 시가총액이 저평가 상태”라는 게 머스트자산운용 측 주장이다. 태영건설 역시 내년 주총에서 양측의 표 대결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KB자산운용은 최근 이수만 회장이 이끄는 에스엠엔터테인먼트를 정조준했다. 에스엠의 특수관계 회사인 라이크기획이 진원지였다. 이 회사는 이 회장의 개인회사로 에스엠으로부터 매년 100억원 안팎의 자문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별 기준으로 에스엠 매출의 5~6% 수준이다. KB자산운용은 경영 개선 차원에서 두 회사의 합병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KB자산운용은 최근 회사 지분율을 7.5%에서 8.3%로 늘리면서 본격적으로 힘 대결에 들어간 상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KB자산운용은 최근 컴투스와 효성티앤씨, 광주신세계 등에 경영 개선을 요구하며 경영진을 압박한 바 있다. 골프존의 경우 소송을 제기해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도 했다”며 “에스엠이 현재 라이크기획에 대한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만큼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경기침체 장기화 여파로 실적이 악화되고, 일감 몰아주기 규제로 2·3세 승계 문제를 고민 중인 재계 입장에서는 또 다른 복병이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경제연구원은 올 초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당한 해외 48개 기업의 고용과 투자, 실적 등을 분석했다. 그 결과 행동주의 펀드가 공격한 기간 고용은 전년 대비 4.8%, 이듬해는 18.1%까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설비투자나 R&D(연구개발) 투자 현황도 마찬가지였다. 공격 이전 매년 증가하던 설비투자는 공격 기간 중 2.4%, 이듬해에는 23.8%나 줄었다.

무엇보다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공격당한 기업의 실적이 크게 감소했다. 당기순이익과 영업이익은 공격 기간에만 각각 46.2%와 40.6%, 이듬해에는 83.6%와 41% 줄어들었다. 반대로 부채비율은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전까지 70% 수준을 유지하다 공격 기간에 90.7%로 상승했다. 이듬해에는 부채율이 전년 대비 21.1%나 증가했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기업의 장기적 발전을 통해 진정한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서는 자기 보유 주주에 대한 인센티브 강화, 차등의결권 도입 등 대책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권 방어장치 강화” vs “재벌의 영속 경영 우려” 

이렇듯 국내 상장사를 겨냥한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 개입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기업의 투명한 경영을 통한 주주 가치 강화가 명분이지만, 현실은 크게 달랐다.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공격당한 상당수 기업의 매출이나 영업이익 등이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펀드 공격에 대비한 경영권 방어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재계에서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이즌필(Poison Pill)과 황금낙하산(Golden Parachute) 제도 등이 대표적이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M&A가 벌어졌을 때 기존 주주가 시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다. 마찬가지로 황금낙하산은 경영자가 임기 전에 해임될 경우 거액의 퇴직금이나 스톡옵션 지급을 명시하는 것이다. 이른바 ‘알박기 펀드’로도 불리는 일부 행동주의 펀드들이 경영권을 탈취해 이사회 장악을 어렵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것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지난 6월 코스피 및 코스닥 상장업체 1882곳(금융사 제외)을 대상으로 경영권 방어조항 도입 현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상장사 중 342개사(18%)가 이미 정관에 경영권 방어조항을 채택했다.

이 중 2개 이상의 경영권 방어조항을 도입한 기업은 127개사(7%)로 나타났다. 일부 기업의 경우 적대적 M&A 시 지급할 대표이사의 퇴직금 규모를 최대 500억원까지 책정하기도 했다. ‘전년도 연봉의 30배’나 ‘퇴직금의 100배’와 같이 일정 배수 등으로 표기한 기업도 22곳이나 됐다.

박동빈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분석3팀 연구원은 “최근 책임투자 확대와 기관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라 국내에서도 주주행동주의가 확산되는 추세”라며 “국내 기업들이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장치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업종별로 보면 IT 관련 기업들의 수가 136곳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뒤를 이어 경기 관련 소비재(57곳), 산업재(53곳), 건강관리(52곳) 순이었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코스피(60곳, 9%)보다 코스닥(274곳, 23%)의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이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이 같은 추세는 재계 전반으로 확대될 것으로 박 연구원은 전망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 교수는 “국내에 ‘글로벌 스탠더드’로 잘못 알려진 재벌 정책부터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상법을 통해 ‘1주 1의결권’ 원칙을 가장 강제적으로 적용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며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펀드들이 한국 대기업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배경에도 한국 내에 흐르는 반재벌 정서와 반재벌 정책이 있다. 이 정책이 만들어놓은 지배구조상 약점을 행동주의 펀드들이 파고드는 만큼 관련 정책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조치들이 자칫 재벌 총수들의 지배력을 영속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우찬 고려대 교수는 “과거 소버린과 칼아이칸, 엘리엇 등 행동주의 펀드의 적대적 M&A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공시 대상 기업 평균 내부 지분율이 57.5%로 높고, 경영권 방어용 전환우선주 등이 도입돼 있는 만큼 기업 경영권과 지배권 인수 위협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면서 “그럼에도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복수 의결권을 기업에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경우 자칫 재벌 총수의 지배를 영속화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실제로 경제개혁연구소에서 최근 경영권 프리미엄 등을 통해 기업 총수들의 사익 편취도를 계산해 본 결과 경영권 프리미엄 부과율이 49~68%에 이르렀다. 그만큼 행동주의 펀드들이 경영권을 탈취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박유경 APG(네덜란드 공적연금운용공사) 아시아 책임투자·지배구조 이사도 11월8일 고려대에서 열린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 주요 이슈와 정책방향’ 토론회에서 “글로벌 투자은행의 경우 삼성전자 외에 주식 투자를 꺼린다. 여기에 복수 의결권까지 기업이 쥐게 되면 외국 투자자의 심리는 더욱 위축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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