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일본 정계의 ‘파친코 커넥션’
  • 류애림 일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1.26 10:00
  • 호수 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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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명분 도박사업 활성화 추진한 아베 정부…의원들 카지노 스캔들 터지며 비판 직면

전쟁은 그 아비고, 운명은 그 어미다. 그리고 도박은 이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눈먼 버릇없는 아이다.’ 근대 일본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자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1868~1894)는 도박을 맹목적이고 버릇없는 아이로 묘사했다. 도박이 부르는 폐해를 지적한 이 오랜 명언이 최근 일본 언론에서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뒷골목에 숨어 있던 ‘문제아’ 도박을 양지로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각종 사회적 병폐가 발생하고 있어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 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 연합뉴스

뇌물 스캔들 중심에 선 ‘카지노 의원 연맹’

지난 연말 발생한 복합리조트(Integrated Resort·IR) 사업을 둘러싼 의원들의 뇌물 수수 사건이 일본 사회를 뒤집어놓고 있다. 일본 정계로 리조트 업계의 검은돈이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다. 사실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는 일본 언론을 통해 계속 제기돼 왔다. 일본 정치에 뿌리 깊게 박힌 ‘파친코 커넥션’ 탓이다. 

2010년 4월 일본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제외한 정당 출신의 의원 74명은 ‘국제관광상업 진흥 의원연맹’(일명 카지노 의원 연맹)을 결성했다. 당시 중의원 정수가 480명, 참의원 정수가 242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일본 의원 열 명 중 한 명꼴로 이 의원연맹에 속해 있었다. 이 연맹은 카지노 합법화와 파친코의 환금 합법화를 목적으로 발족했다. 현재는 무려 224명의 의원이 이 연맹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불법이었던 도박을 합법화하겠다는 게 연맹의 목적이다. 

이제까지 일본 파친코 업계는 ‘삼점방식’ 운영으로 법망을 피해 왔다. 삼점방식은 일본 파친코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영업 형태다. 파친코·경품교환소·경품도매상이 한 묶음이 되어 운영되는 형태로, 파친코에서 딴 경품을 현금화하는 시스템이다. 일본에서 도박은 금지돼 있다. 특별법으로 공익성을 인정받은 공영도박 경마와 경륜을 제외하고 금전이 오가는 노름은 불법이다. 따라서 파친코에서는 돈 대신 경품을 지급하고, 파친코 이용객은 이 경품을 경품교환소에 가져가 현금화한다. 그리고 경품도매상은 경품교환소에서 경품을 사들여 다시 파친코에 공급하는 형식이다. 이런 방법으로 법망을 교묘히 피해 왔지만 이제는 당당히 현금을 지급할 수 있는 합법적 도박장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파친코 점포 내에 설치된 은행 ATM 철거 등 규제 강화와 시대에 뒤처진 오락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이용객이 점점 줄면서 파친코 회사와 업장 모두 크게 감소했다. 1995년에는 전국에 약 1만7500여 점포에 이르렀던 것이 2018년에는 약 9100개까지 줄어들었다. 정치력을 이용해 현금 지급을 합법화하고 하향세인 파친코 사업을 회복시키겠다는 게 파친코 사업자들의 야심이다. 대규모 파친코 사업자들로 구성된 ‘일반 사단법인 파친코 체인스토어 협회’에는 ‘정치 분야 어드바이저’가 있다. 홈페이지에서 공개하고 있는 명단에는 2019년 11월 기준으로 자민당 의원 22명, 유신회 의원 7명, 국민민주당 7명, 입헌민주당 4명 등 총 40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중에는 ‘카지노 의원 연맹’에도 이름을 올린 의원이 적지 않다.

현재 일본 환경 부(副)대신과 내각부 부대신을 맡고 있는 이시하라 히로타카(石原宏高)에게도 2012년 파친코 업계와 관련한 스캔들이 있었다.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의 삼남으로 중의원 4선의 중진 의원이다. 이시하라는 2012년 12월에 실시된 제46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파친코 기계 제조회사 ‘유니버셜 엔터테인먼트’(UE)에 선거 지원을 요청하고, 사원들을 선거운동에 동원했는데 UE는 선거운동에 사원을 파견하고 급여를 지급했다. 선거법 위반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또 이시하라의 부인이 임원인 컨설팅회사에 UE가 컨설팅 비용 명목으로 2011년 6월부터 2012년 말까지 매달 100만 엔(약 1053만원)씩 총 1800만여 엔(약 1억9000만원)을 지급한 것이 2013년 3월 아사히신문의 취재 결과 밝혀지기도 했다. UE가 컨설팅 비용을 지급한 데는 현역 시절부터 카지노 추진파였던 아버지 이시하라 신타로의 영향도 컸다. 또 UE가 필리핀에 대규모 카지노 리조트를 건설하는 데 필리핀 정계와 연줄이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의 도움을 받기 위해 법망을 피해 돈을 지급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시하라는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으며 카지노 의원 연맹의 주요 멤버이기도 하다.

실제 카지노 의원 연맹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2016년 12월 ‘특정복합관광시설구역 정비 추진에 관한 법률’(IR 추진법)이 생겼고, 2018년 7월에는 ‘특정복합관광시설구역 정비법’(IR 실시법)이 성립돼 형법이 정하는 도박죄에서 카지노를 제외해 일본에서도 합법적으로 카지노를 설치할 수 있게 됐다. 2016년부터 일본 언론은 카지노 지지파들이 주장하는 지역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표하며 카지노 설치 추진을 비판했다. 2018년에 카지노가 합법화되자 마이니치신문은 ‘도박에 기대는 발상의 빈약함’, 아사히신문은 ‘도박 대국에의 위험한 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여전히 씻어낼 수 없는 카지노에 대한 근심’이라는 사설을 일제히 실어 카지노 해금을 비판했다. 이후 카지노 관련 논의는 잠잠해졌는데, 최근 발생한 의원들의 뇌물 수수 의혹이 다시 한번 논란에 불을 지피는 모양새다. 뇌물 수수 혐의로 1월14일 체포된 아키모토 쓰카사 의원을 비롯해 이번 스캔들에 등장하는 모든 의원이 카지노 의원 연맹 소속이다.

일본 후쿠시마현의 한 파친코 게임장 모습 ⓒ REUTERS
일본 후쿠시마현의 한 파친코 게임장 모습 ⓒ REUTERS

카지노 반대 54%…고민 깊어진 아베 정부  

아베 신조 정부는 경제성장 전략 중 하나로 IR사업을 추진해 왔다. 스캔들이 불거졌는데도 계속 사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이며, 리조트 유치 주체인 요코하마나 오사카 같은 지자체들도 적극적으로 유치 의사를 밝히고 준비 중이다. 지난 1월7일에는 ‘카지노 관리 위원회’를 예정대로 발족시켰다. 카지노 관리 위원회는 카지노 출입을 감시하는 시스템과 카지노에서 설치 가능한 게임의 종류, 기종에 관한 규칙을 만든다. 또 카지노 운영 사업자를 심사하고 면허를 부여하는 권한을 가진다. 이 위원회가 발족함으로써 카지노 설치의 첫발을 내디뎠다.

일본에서는 이미 도박중독자가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다. 도박죄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도박의 성격을 가진 파친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로 도박중독이 엄연히 존재하고 스캔들이 발생했음에도 꿈쩍 안 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이 어느 때보다 거세지고 있다. 뇌물 수수 스캔들을 계기로 카지노 사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NHK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IR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답변이 54%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25%)을 크게 웃돌았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월12일 NHK 방송에서 IR 관련 스캔들을 언급하며 “국민들에게 걱정과 불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신뢰와 이해 속에서 IR 정비법에 기초해 필요한 준비를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NHK 여론조사 기준으로 지난해 8월 이후 내각 지지율이 점점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아베 총리가 어떻게 IR 스캔들을 헤쳐나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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