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이 불러올 신세계…패권전쟁과 연대의 갈림길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0.12.22 10:00
  • 호수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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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 新냉전 구도 속 ‘G0 시대’ 지속 가능성
‘대안적 질서와 체제’ 요구 목소리 커질까 주목

백신은 코로나19에 대한 인류 최초의 반격이다. 코로나 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는 인류의 유일한 무기다. 효과만 있다면 코로나19로 멈췄던 일상을 복원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우리가 그 전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을 붕괴시켰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일정·과정·시스템이 중단·단절·붕괴되는 대혼란(이혜정 중앙대 교수)을 가져왔다. 백신이 개발돼야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안타까운 목숨을 잃지 않게 할 수 있다. 전 인류가 백신 공급과 접종 소식을 숨죽여 기다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백신의 희소성이다. 인류의 반격은 늦었다. 사실 백신 개발은 전례가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뤄졌지만 그간 너무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그만큼 개발이 어려웠다. 백신을 자체적으로 개발한 나라는 극소수다. 미국과 영국, 독일, 중국, 러시아 정도다. 각 국가가 투입할 수 있는 자원과 바이오 기술력 등을 감안하면 한동안 이들 나라 외에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아직 충분한 접종이 이뤄지지 않아 그 효과를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속 사망자 숫자를 감안하면 백신을 접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나 다름없다. 

잔인한 현실은 여기서 시작된다. 희소한 백신은 그 자체로 막강한 권력이 됐다. 지금 인류는 다 같은 인류가 아니다. 백신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게 됐다. 다른 이야기도 시작된다. 권력은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백신을 쥐는 자가 패권을 쥐게 되는 세상이다. 미국과 중국은 벌써 백신을 두고 패권전쟁을 펼치고 있다. 두 나라는 모두 코로나19로 체면을 크게 구겼다. 중국은 코로나19의 발원지로 지목되며 ‘우한 바이러스’라는 서구 사회의 비난을 한동안 받았다. 중심을 잡아줄 것이라 기대했던 미국은 오히려 가장 많은 사망자와 확진자를 쏟아내며 가장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코로나 시대엔 미국(G1)의 시대도, 미국과 중국이 경쟁(G2)하는 시대도 아닌 패권 부재를 의미하는 ‘G0(제로) 시대’가 만들어졌다. 

권력만큼 ‘잔인한 축복’이 없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종식시킬 수 있는 백신의 패권을 두고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시사저널이 예측 가능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정리했다. 

백신 패권이라 쓰고 세계 패권이라 읽는다

백신을 두고 미국·유럽과 중국·러시아는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마치 냉전 당시의 달 탐사 경쟁을 보는 듯했다. 러시아는 자체 개발한 백신의 이름을 ‘스푸트니크 V’라고 붙였다.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이름을 땄다. 세계 최초의 백신은 체제 우위를 상징한다. 동시에 그 백신을 개발한 국가는 포스트 코로나의 글로벌 질서를 주도할 수 있다. 백신 개발을 주도한 국가 중심으로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이 재편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중국이 치고 나왔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미국과 유럽으로 들불처럼 번지던 지난 5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세계보건총회에서 “백신을 글로벌 공공재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서방이 백신을 독점할 것이라는 우려가 급속도로 퍼지던 시점에 나온 파격 선언이었다. 백신이 보건 문제를 넘어 패권 경쟁의 수단으로 부각된 순간이다. 

러시아는 지난 8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백신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중국은 이미 100만 명 넘게 백신 접종을 마쳤다며 세계 최초 타이틀 경쟁에 불을 지폈다. 중국은 아예 9월 방역 유공자 포상 행사를 성대히 치르며 코로나19 종식을 선언했다. 미국에서 확진자와 사망자가 각각 700만 명, 20만 명을 넘어설 때였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바라는 백신 패권은 여전히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중국과 러시아의 백신 효능과 검증 결과에 대해 완벽한 신뢰를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백신의 국제표준을 선점하면 코로나19 이후의 글로벌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데, 국제사회는 중국과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중국과 미국은 백신을 두고 치열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AP 연합·AFP 연합

시나리오1  백신 이기주의와 패권 경쟁

코로나19는 미국 대통령도 바꿨다. 웬만하면 현역 대통령의 재선을 허락하는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28년 만에 단임 대통령의 불명예를 안았다. 그만큼 미국도, 세계도 ‘미국 우선주의’를 외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피로도가 높았다. 그 어느 때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선 글로벌 협력이 필요했지만 오히려 국제사회는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다. 각자도생 시대엔 국가 경쟁체제가 펼쳐진다. 국가 경쟁체제란 기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에 기반한다. 바이든 당선인이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고 선언했지만 한동안은 자국 이해를 중시하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지금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백신 확보’다. 문제는 신뢰할 수 있는 백신을 공급할 미국의 코로나19 상황이 처참하다는 점이다. 한동안 미국은 생산되는 백신의 대부분을 자국에서 써야 할 가능성이 크다. 백신은 죽고 사는 문제를 결정한다. 각자도생의 경쟁체제 속에서 각국은 앞다퉈 백신 분량을 확보하는 ‘백신 이기주의’ 태세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이 틈새를 중국과 러시아 등이 노리며 패권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가능성도 크다. 화이자·모더나와 같은 미국산 백신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제3세계 국가들 입장에선 구하기도 힘들다. 서구 백신에 비해 저렴한 가격은 중국산 백신의 확장성을 키울 최대 강점이다. 이미 중국은 코로나19 발생 이후 150여 개국에 마스크와 방호복, 진단키트 등을 대거 지원하는 ‘방역 외교’로 영향력을 키웠다. 이제는 ‘백신 외교’도 주도하겠다고 한다. CNN은 “중국이 보건 실크로드를 열고 있다”고 평가했다.

시나리오2  백신 공유로 글로벌 질서 회복

‘소프트파워’ 개념의 창시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코로나19로 현존의 세계 질서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코로나19 정국 내내 다양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한마디로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최근 나이 교수는 “초국가적 사태는 패권 국가의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다양한 국가들의 ‘협력하는 권력’이 돼야 문제가 해결된다”며 “시간이 걸리겠지만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깎아먹은 소프트파워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약 바이든 당선인이 백신을 세계와 공유한다면 국제사회의 리더로서 완벽히 복귀할 수 있을 전망이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바이든 당선인이 백신을 세계와 공유하겠다고 밝힌다면 미국은 과거처럼 세계를 이끌던 리더 국가로 ‘백(back)’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임 교수는 “미국이 다시 국제사회의 리더로 컴백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데 화이자나 모더나 등의 백신을 미국이 독점하지 않고 세계와 공유하는 것만큼 중요한 수단은 찾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미국 일국 체제의 국제 질서가 형성될 전망이다. 이런 흐름에 중국과 러시아 등이 강하게 저항할 수 있겠지만, 미국의 우위를 인정하며 한동안 ‘협력적 경쟁’ 흐름을 보일 가능성도 있다. 

시나리오3  대안적 질서 요구 커질 수도

코로나19로 인류가 각성한 몇 가지가 있다. 지금까지 삶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 주요국들은 기후위기에 대응한 탄소 중립, 그린 뉴딜과 같은 다양한 정책들을 선보이고 있다. 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난(각성한) 인류는 국가라는 단위를 넘어 환경·생태·보건 등에서 전 세계인이 협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낼 가능성도 있다. 기성세대에게 큰 울림을 줬던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전 세계에서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적 석학 슬라보예 지젝은 저서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에서 “이제는 남들과 연대하는 것이 옳은 결정이 됐다. 길게 보면 내 이웃의 안전이 곧 나의 안전이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나눔과 협력이 바탕이 되는 국제주의가 바로 뉴노멀”이라고 밝혔다. 백신을 두고서도 이런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현재 세계보건기구는 글로벌 백신 공급 프로그램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를 추진 중이다. ‘일부 국가의 모든 사람’이 아닌 ‘모든 국가의 일부 사람’이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현재 코백스에서 빠져 있는 바이든 체제의 미국이 국제 여론의 압박에 합류할 가능성도 있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저서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현 세계를 떠받치던 체제, 즉 산업의 지구화, 생활의 도시화, 가치의 금융화, 환경의 시장화라는 네 개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며 “인류가 붕괴하지 않으려면 포스트 코로나 문명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밝혔다. 지젝 역시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비전이 나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야만주의로 퇴보하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신 이후의 세상은 코로나19 이전과 똑같을까.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과연 어떨까.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 히브리대학 교수의 말이다. 그는 영국 신문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인류는 선택해야 한다. 분열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연대의 길을 택할 것인가? 만약 우리가 세계적인 연대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승리일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모든 미래의 전염병과 위기에 대한 승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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