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를 만든 남자] “박정희, 롯데 신격호에게 100억 엔 요구”
  • 천영준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williamcheon@gmail.com)
  • 승인 2021.01.25 15:00
  • 호수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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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를 만든 남자, 신격호론 분석 - 2회]
신격호, 포항제철 박태준 사장에게 일본 인맥과 사업계획 다 넘겨
“비슷한 것은 가짜, 오리지널을 창조하라”

롯데를 제과 왕국으로 만든 ‘다섯 개의 기둥’이 있다. ①추잉껌(1950년 초 출시) ②초콜릿(1960년대 초 출시) ③캔디(1960년대 후반 출시) ④아이스크림(1970년대 초 출시) ⑤비스킷(1970년대 중반 출시)이다. 신격호에게는 하나의 카테고리에서 성공을 거둔 후 그다음 카테고리로 넘어갈 때마다 매우 큰 숙제가 있었다.

첫째로 일본 제과업계의 강호인 모리나가, 메이지 등과 다른 마케팅 전략으로 시장을 석권하는 것이다. 둘째는 유럽, 미국의 과자 맛을 철저히 연구하되 일본 시장에 맞는 맛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신격호의 측근들에 따르면 그는 ‘비슷한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을 창조해 내려고 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천재 문인 박지원(朴趾源)이 주장했던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1991년 5월4일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개점 기념식에 참석한 신격호 명예회장 내외와 신동빈 회장(맨 뒤)ⓒ시사저널 포토

초콜릿 인재와 정보 얻기 위해 부인들에게 진주 선물

‘1000만 엔 현상금’ 공모로 수십억 엔에 가까운 효과를 누리고, 껌 시장에서 하리스를 누른 후 신격호가 주목한 다음 상품은 초콜릿이었다. 신격호는 1963년 5월 업계 전문지 기자들과 주요 특약점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가을경에는 초콜릿을 판매하고자 한다”고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던 우라와 공장(浦和工場·1964년 2월 준공)이 그 기반이었다. 신격호는 자신이 신임하는 직원인 노나카 히사오(能仲久夫)와 오토모리 히데타카(乙守秀隆)를 유럽에 1년 반 정도 파견한 뒤, 시장분석 결과를 받았다. 이미 1961년 11월 ‘초콜릿 생산 준비계획’을 내부적으로 완료한 상태였다.

당초 초콜릿 신상품 출시에 대한 업계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당장 금융권이 지원을 거절했다. 롯데라는 신참자가 어떻게 메이지제과나 모리나가제과를 뛰어넘겠다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시중은행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우유 수입 규제가 있었다. 앞선 양강(兩强)처럼 유업 계열사를 갖지 않은 롯데 입장에선 원료 입수가 큰 난관이었다. 이에 신격호는 전지분유와 카카오를 혼합한 ‘카카오프리퍼레이션’을 초콜릿 기초재료로 쓰기로 했다. 관세를 내기만 하면, 충분히 입수 가능한 조건이었다.

시중은행들은 롯데의 신사업에 대한 지원을 거절했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높게 산 마루베니상사와 미쓰비시상사가 자금을 빌려줬다. 당시 설비투자액이 160억 엔으로 큰 규모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사들도 롯데를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한 셈이다. 초콜릿의 타입에는 크게 ①평면 형태의 판 초콜릿, ②웨하스, 비스킷에 초콜릿을 코팅한 피복 초콜릿 ③초콜릿 틀 안에 넛츠 등을 넣은 충전 초콜릿이 있다.

신격호는 모리나가와 메이지가 가장 잘 만든다고 정평이 난 판 초콜릿 시장에서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생산공장 규모는 우라와의 10만㎡. 남들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초콜릿을 만드는 것이 롯데의 목표였다. 하지만 또 다른 숙제가 있었다. 전체 공정을 관리·감독하고 초콜릿의 재료와 콘셉트를 신기에 가깝게 가공하는 기술자가 필요했다. 이에 신격호는 넷째 동생 신선호에게 지시해 유럽 현지에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정보전에 돌입했다. 초일류 호텔을 빌려 파티를 열고 유수의 초콜릿 공장장과 그 부인들에게 진주를 선물하며 네트워크와 정보를 얻으려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2년 7월 막스 브라크라는 스위스 출신 기술자를 찾아냈다. 신격호는 그에게 “공장 설계, 재료, 공정 관리 모든 것을 일임할 테니 이 세상에 없는 초콜릿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브라크는 개도국의 중소기업 오너가 ‘저비용·고효율 생산’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품질과 설비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심혈을 기울여 일본인의 입맛에 맞춤화된 초콜릿을 만들어냈다. 수천 번의 실험과 시식 끝에 ‘롯데 가나 밀크 초콜릿’이 출시됐다.

1982년 국무총리공관에서 만난 유창순 총리서리와 신격호 롯데 회장ⓒe영상역사관

한·일 수교 막후 조정…이후락 소개로 박정희와 직접 전화도

1964년 2월 롯데는 당초 예정했던 초콜릿 신상품 물량의 2배를 내놓으며 공격적 마케팅을 전개했다. 가격은 개당 50엔으로 패키지는 다른 기업 상품과 확연히 차별화된 새빨간색이었다. 경쟁 브랜드들은 옅은 갈색 포장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 롯데 초콜릿 패키지를 크게 인쇄한 가방을 들고 50명의 여성 마케터(롯데 슈퍼백 부대)가 긴자, 신주쿠, 시부야 등 번화가에 출몰하게 했다. 도쿄 내 민영방송국 3곳의 스폿 광고를 통째로 사서 한 주에 500회씩 방영하기도 했다. 2000개 이상의 골프장 개인 회원권을 신격호 본인의 명의로 구매해 현장 마케팅에 활용했다. 1969년경 일본 초콜릿 시장의 수요는 정점을 찍었지만, 롯데의 매출은 예외였다. 3차 증산까지 한 끝에 1973년 시장점유율 기준(전체 시장 규모 2000억 엔)으로 메이지제과 22.8%, 모리나가제과 22.7%, 롯데 17.1%, 에자키그리코 16.3%의 판도가 형성됐다.

신격호는 제과사업으로 성공한 지 약 10년 만에 금의환향 프로젝트의 꿈을 꾸게 된다. 그는 개개의 비즈니스보다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활동하고자 했다. 1950년대 말부터 가까워진 친한파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를 비롯해 남만주(南滿洲) 관동군 참모 출신의 세지마 류조(島龍三·훗날 이토추상사 회장) 등과 맺은 인연이 매우 큰 자산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날 일본 우익의 뿌리라고 하는 정치인, 기업인들이 모두 신격호와 막역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혁명정부는 경제재건을 위해 일본과 국교 회복을 도모한다. 이때 막후 조정자로 선택된 인물 중 한 명이 신격호였다. 그의 고향 후배이자 학교(공립울산농업실수학교) 후배였던 이후락(李厚洛)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가교 역할을 했다. 이후락은 장면 정권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이었음에도 뛰어난 영어 실력, 타고난 정무 감각으로 박정희의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1963년 그가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자 신격호는 박정희 대통령과 직접 전화를 하는 몇 안 되는 정상(政商)이 되었다.

일본과의 국교 회복 과제는 박정희 정권보다 신격호가 먼저 발을 들인 프로젝트였다. 1957년 당시 재산청구권협상 수석대표였던 유창순은 한은 도쿄지점장을 지내며 전쟁 중에도 자금을 예치하던 신격호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한·일 관계 실무에 자연스럽게 발을 디뎠기에, 박정희 정부로서도 정상의 감각을 십분 활용하고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신격호는 겉으로는 정치와 거리를 뒀음에도 이면에서는 외무성 국장, 대일청구권 금액, 한국의 일본 어선 나포 당시 일본인 여행자의 체재 시간 문제 등과 같은 민감한 현안들을 모두 건드리고 있었다.

1963년 2월에는 배의환 주일 대사에게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을 직접 소개한다. 역대 총리를 긴장시킨 ‘모사꾼’ 가와지마 쇼지로(川島正次郞) 행정관리청 장관에 이어, 자민당 부총재인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총무회장 아카기 무네노리(赤城宗), 훗날 중의원 의장이 되는 후나다 나카(船田中) 등이 참석한 자리였다. 저마다 파벌의 수장이거나 실세로 분류되는 사람이었다. 이 자리에서 신격호는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의 국회 비준과 함께 아즈마 류타로 도쿄도지사의 재선(再選)까지 논의했다.

한·일 수교 회복 당시 신격호가 자주 협의했던 일본 자민당 오노 반보쿠 부총재ⓒ닛케이경제신문

공들였던 정유사업은 락희화학(GS칼텍스)에 넘어가

1963년,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한 뒤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격화한다. 그리고 1964년 여름 도쿄올림픽이 끝나던 8월, 베트남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에 북베트남군이 어뢰를 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1972년까지 이어지는 장기전의 서막이었다. 이번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도 거대한 군수공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런 국제정치의 전개 과정 속에서 1965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됐고, 네 가지 부속협정이 동시에 성립했다. 대일청구권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은 그중 네 번째였다. 조건은 일본이 10년간 무상 3억 달러 공여, 유상 2억 달러의 차관, 별도의 민간 차관 3억 달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무상공여분만으로도 한국의 국가예산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달러 외환보유고의 절반 정도 분량이었다.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장기영은 신격호에게 “공장 부지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협력을 하겠으니 군수산업에 투자해 달라”고 했다.

그 첫 단추가 1966년 6월 논의가 시작된 제2정유공장 사업신청(1정유공장은 한국석유공사) 건이었다.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있는 기업은 락희화학(구인회), 판본방적(서갑호), 동방석유(신격호), 한양재단(김연준), 삼양개발(손대승), 한국화약(김종희)이었다. 하지만 신격호 본인에 따르면 제2정유공장은 이미 동방석유로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 정부에서 먼저 찾아와 지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격호는 1965년 7월부터 8월까지 서울에 머무르며 신규사업과 관련된 계획을 정부 측과 협의하고, 이면에서는 한·일 교섭과 관련된 뒤처리를 돕는 입장이었다. 이 와중에도 이후락은 “박 대통령이 제철소 건설에 의지를 갖고 있는데 자본 유치가 어렵다. 롯데가 나서주면 어떻겠느냐”고 새로운 제안을 했다. 미쓰이물산(三井物産)에서 융자를 받아 동방석유를 설립하고, 정유사업에 필요한 자금까지 모두 맞춘 상태에서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격호는 대통령비서실장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군사정권이 결심한 이상 일을 돌이키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갈조조’로 불리던 이후락이 지도자의 뜻을 참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신격호는 제2정유공장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대신에 자본금 500만원 규모의 동방알미늄공업을 1966년 설립한다. 알루미늄 도금을 비롯해 캔 등을 만들기 위한 종합포장소재 회사로 훗날 롯데알미늄(1980)이 되는 기업이었다. 제2정유공장은 락희화학이 낙찰받아 오늘날 GS칼텍스가 된다.

신격호는 박정희와 이후락의 제안을 받아들고 김학렬 경제수석을 만나 제철소 건립안을 협의했다. 일본 주오(中央)대학 유학생 출신으로 외교관으로 공직에 입문해 경제관료로 방향을 선회했던 김학렬은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의 김철우 박사가 제철기술의 권위자이므로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 권했다. 신격호는 정치인은 100% 신뢰하지 못하지만 기술자는 믿었기에 김철우와 금방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간 10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립 계획과 사업화 조사에 착수했다. 여기에만도 3000만 엔의 돈을 들였다.

신격호가 제철소 설립 준비 당시 자주 자문을 구했던 나가노 시게오 후지제철 사장ⓒ닛칸공업신문

김철우는 후지제철의 경영을 회복시킨 일본 제철업계의 원로 나가노 시게오(永野重雄)를 신격호에게 소개했다. 그는 전후(戰後) 연합군에 의해 해체된 일본제철의 4개사 중 2개사인 야하타제철과 후지제철을 신일본제철(일본제철의 전신)로 통합해 1970년 회장에 취임한 인물이다. 나가노는 신격호에게 가와사키제철을 비롯해 주요 제강사의 CEO들을 연결해 줬고, 나중에는 유럽 회사들까지 만날 수 있게 했다. 1년의 연구 과정을 거쳐 ‘연간 100만 톤 생산, 총액 1억 달러 투자’를 골자로 한 제철소 사업계획이 섰다. 그중 3000만 달러는 신격호 본인이 직접 투자하고, 나머지 7000만 달러는 일본 차관으로 조달할 요량이었다.

여기서 조금 수정안이 덧붙여져 “연간 120만 톤 생산을 목표로 제철소를 만든다”는 내용이 한국 언론에 보도됐다(매일경제신문 1967년 7월26일자). 하지만 같은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상공부가 “1차 연간 생산 목표는 60만 톤으로 조정한다. 국내 수요를 고려한 조치”라고 밝힌 것이다. 수요 계획이 뒤틀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아일보가 “장기영 경제부총리는 26일 오전, 2차 5개년계획 기간 안에 건설되는 종합제철소는 국영으로 할 방침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또 장 부총리는 신격호가 최종안으로 제출한 8700만 달러 분량의 차관 신청서에 대해서는 “참고해서 반영하겠다”고 가볍게 취급해 버리고 “재일교포에게는 중후판(두꺼운 판상 강판으로 선박, 교량, 산업용 기계에 사용) 공장을 맡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2정유공장에 이어 한국 정부의 ‘두 번째 배신’이었다.

1960년대 당시 신격호의 한국 롯데 실무를 맡은 신춘호(후일 농심그룹 회장·왼쪽)와 정보 수집을 담당했던 신선호(산사스 회장)ⓒ한겨레재팬

신격호, 신선호에게 “정치자금 요구 건은 절대 비밀로 하라”

군사정권의 국제정치를 물심양면 지원했지만, 돌아온 것은 뒤통수였다. 정통성이 부족한 혁명정부의 약점을 일본 정계와의 네트워크로 보완해 줬건만 “중요한 산업은 국내 기업이 담당한다”는 매몰찬 답만 받은 것이다. 이는 훗날 롯데가 ‘이중으로 받은 차별’(일본에서의 차별과 한국에서의 차별)을 토로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격호는 김철우 박사의 요청으로 도쿄대 연구실에서 초대 포철 사장으로 내정된 박태준(1927~2011)을 만났다. 그는 와세다대 이공학부 후배이기도 했다(수료 후 육사 졸업). 대한중석의 경영 회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신규 국영 사업에 뛰어든 박태준을 만나자마자 신격호는 “모든 답은 정해져 있다”고 직감하고 제철소 사업계획 내용 전체를 포함해 그간 만나왔던 일본과 유럽의 제철업계 네트워크 모두를 넘겨준다. 훗날 박태준은 유학자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의 소개로 나가노 시게오 회장을 만나 후지제철, 야하타제철, 일본강관 3사 협력으로 최신 플랜트를 포항제철에 공급하는 협조를 받는다.

신격호의 동생인 신선호 산사스 회장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소 설립 논의 와중에 정치자금 공여를 신격호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70억 엔’을, 나중에는 ‘30억 엔’의 비자금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최고 권력자에게 직접 돈을 주면서까지 사업을 성공시킬 마음이 없었던 신격호는 박정희의 요구를 못 들은 척했고, 이것이 훗날 사업에서 탈락된 요인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선호에게는 “이 일을 절대 비밀로 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신격호가 제철소 설립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미쓰비시그룹 전체의 사장 모임인 ‘금요회’를 조직한 미쓰비시은행의 다지쓰 와타루(田), 세이부백화점의 쓰쓰미 세이지(堤淸二), 나가노 시게오와 함께 일본 제계의 거두가 되는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야하타제철 회장 출신)가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신격호가 박태준에게 넘겨준 네트워크 속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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